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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사람과 사람

30년 음악 인생, 기타 선율의 장인 l 기타리스트 함춘호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 등 각종 인기 TV프로그램의 활약에 힘입어 대중음악계가 새로운 부흥기를 맞는 듯하다.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좋은 노래들, 그 멜로디들은 삶에 새로운 희망을 주기도 하고 위로를 주기도 하며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한 명곡이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하는 데에는 숨어있는 조력자가 많으니 바로 악기 연주자다. 흔히 세션맨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이들은 녹음실에서 음악이 탄생하는 그 순간 장인과 같은 정성으로 한 음한 음 음반을 완성해 간다. 올해로 데뷔 30년 차를 맞는 전문 기타 연주자 함춘호 씨를 만나 보았다. 이재윤 | 사진 김준영

저는 기타를 연주할 때 무언가 말을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함춘호의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놀러와>의 세시봉 특집과 <유희열의 스케치북> 100회 특집에 출연하며 갑자기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졌어요. 갑작스러운 인기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쑥스
러운 듯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순수한 연주자의 감성이 묻어난다. 최근에 한국소리 모음회라는 전문 연주인들의 모임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연주인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100회 특집에 대해서 유희열씨와 함께 생각을 나눈 적이 있어요. 항상 뒤에서만 수고하는 연주인이 주인공이 되는 멋진 공연을 한번 마련해 봤으면 좋겠다고 했죠.” 베이시스트 신현권, 기타리스트 함춘호, 드러머 배수연, 색소폰 김원용 등 국내 최고의 뮤지션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함께 무대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100회 특집은 특별했다. 출연자를 대표해 함춘호가 소감을 말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연주자를 위한 공연에 뭉클한 감정이 들었어요.” 세시봉 특집의 여파 또한 강했다. 대중은 함춘호라는 기타리스트에 뒤늦게 집중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부터 한국에 유통된 대다수의 음반에서 그의 이름을 찾게 된다. 예전에 2시간짜리 가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2시간 내내 나오는 모든 곡이 제가 기타 세션으로 참여하여 녹음한 곡이더라구요. 참 신기했어요.” 가수와 프로듀서들은 함춘호만 낼수 있는 기타의 느낌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가 그렇게 많은 음반을 녹음한 이유일것이다. “저는 기타를 연주할 때 무언가 말을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작곡자가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이 노래를 만들었구나 … 이런 생각을 많이 하죠. 그런 식으로 음악을 통해 말을 걸려고 노력하죠. 그런 느낌이 좋은가 봐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지만 그는 연주력 면에서도 국내 최고다. 초창기에는 전인권과 듀엣 활동을 했었고, 들국화 1집의 모체가 되는 음원을 녹음했으며 하덕규와 시인과 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올해가 데뷔 30주년인 그의 음악 인생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와 동일하게 흐른 세월이었다.

 


연주자와 기획자, 조명, 음향 등 관련된 스태프가 하나의 팀을 이루어

처음에 그는 성악으로 음악을 접하였지만 자연스럽게 통기타를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기타는 노래를 위한 반
주 도구에 불과했다. 그가 음악을 더 친숙하게 접한 것은 교회였다. 당시 문화가 그랬듯이 교회에 가면 앞선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통기타가 있었고 가스펠이 있었다. 목사님이 주신 성경 구절로 작곡을 해서 문학의 밤에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를 기르는 것에 대한 지적, 드럼 등 악기들이 세속적이라는 지적 등에 반감이 생겨 자연스럽게 교회가 멀어지기도 했다. 학생시절부터 음악인으로서 인생을 확정한 그는 당시 통기타의 메카였던 무교동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한 시대의 문화 흐름을 주도하는 장소, 공간이 있는
것 같아요. CCC의 경우도 정동을 중심으로 청년들의 신앙, 문화 운동이 있었다고 볼 수있죠. 무교동도 그런 곳이었어요. 그 당시 전인권 씨와 같이 듀엣을 하며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만났죠.” 그렇게 차곡차곡 음악적 내공을 쌓아가던 그는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를 만난다. 당시 함춘호는 대구에 내려가 기거하는 중이었는데 숙소에 찾아온 하덕규는 그동안 작곡한 곡을 들려주고 시인과 촌장으로 함께 활동하기를 권유했다고. 그렇게 해서 시인과 촌장의 음반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1년 남짓의 짧은 활동을 끝으로 하덕규는 신앙의 영역으로 더욱 집중하고 함춘호는 일반 음악시장에서 전문 연주자로서 길을 선택하며 자신만의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 그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섭외 1순위 기타 세션맨이다. 대화를 끊는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전화를 끊고서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문의를 해왔다고 설명한다. 한류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K-POP 육성 방안을 정부가 구성 중인데 그에 관련한 문의를 요청한 것이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국의 음악이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공연의 전반적인 부분, 다시 말해 연주자와 기획자, 조명, 음향 등 관련된 스태프가 하나의 팀을 이루어 앞선 공연 문화를 수출하는 형태가 되어야지, 단순히 아이돌 스타 몇 명만으로 밀어붙이면 금방 한계에 부딪힐 겁니다.” 이제 그는 연주자의 자리를 넘어 한국 음악 시장의 전반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멘토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 음악을 해도 아티스트로서 자부심을 품고 당당할 수 있는


최근에 그는 오랜 시간 기다리시며 인생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다고 했다. “예전에 제가 담배를 많이 피웠거든요. 교회는 다녔지만. 정말 담배는 못 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때가 되니까 자연스럽게 끊게 되더라구요. 하나님이 웃으시며 그러시는 거 같아요. ‘거봐, 이 녀석아.’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손길에 이끌리는 것 같아요.” 는 크리스천연주자협회CMA의 회장직도 맡고 있다. 크리스천 연주자 후배들에게 따가운 충고도 잊지 않는다. “물론 영성도 갖추어야 하지만 음악 연습은 독하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중요해요. 기독교 음악을 해도 아티스트로서 자부심을 품고 당당할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합니다.” 겸손한 미소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자부심은 수많은 인고의 연습 시간에서 나온 것이리라. 일반 대중음악시장에서 첫 번째 개인음반을 준비 중인 그는 최고의 음반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따뜻한 이야기와 최고의 테크닉이 공존하는 명작을 만들어 보려는 욕심이 있어요.” 기타리스트 함춘호, 음악 인생 30년의 깊이가 쌓인 장인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