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 앳 어 퓨너럴 DEATH AT A FUNERAL>
닐 라뷰트, 2010


“오프닝 씬은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에게 보내는
백지의 초대장이다”. - 쿠엔틴 타란티노

혹시 당신은 영화가 시작한 후 5분 내외를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는 시간으로 여기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한창 물오른 파티장에 뒤늦게 도착해 뒷북을 치는 센스 없는 초대 손님인 것이다.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이하 오프닝 시퀀스)는 ‘오프닝 크레딧’ 혹은 ‘타이틀 시퀀스’ 로 불리기도 한다. 영화 초반 2~5분 동안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첫 인상이자 관객을 짧은 시간 내에 영화에 몰입하게 하는 기제이며, 영화의 주제와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해내는 프롤로그의 기능까지도 담당한다.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는 ‘영화 속 의 영화’라고 불릴 만큼 그 예술성과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데스 앳 어 퓨너럴>
의 오프닝 시퀀스는 관객에게 영화의 주제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줄 뿐만 아니라, 자칫 한국의 막장 드라마와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영화를 더욱더 풍부하게 읽게 하는 깨알 같은 주석이다.


인간 삶에 관한 지극히 현실적인 묘사

닐 라뷰트 감독은 원작인 프랑크 오즈 감독의 2007년 작 영국 영화 <Death at a funeral>을 미국판으로 리메이크 하며 배경 설정을 영국 중산층 백인 가정에서 미국 중산층 흑인 가정으로 바꾸었다. 원작인 프랑크 오즈 감독의 2007년 작 영화<Death at a funeral>은 국내에서 2008년 <Mr.후아유>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이 변화
때문에 영화는 백인들끼리의 소동극에서 흑인, 백인, 성적 소수자와 난쟁이까지 등장하는 역동적인 소동극이 되었다. 이 설정은 원작보다 영화의 주제를 훨씬 더 설득력 있게 그려내도록 하며, 한층 더 풍부한 결을 지니게 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 모든 것을 세심하게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이 영화의 속살을 오프닝 시퀀스로 파헤쳐 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빨갛고 가느다란 선들이 오른쪽을 향해 불규칙한 높
낮이로 뻗어나간다. 이내 우리는 그것을 심장박동 그래프임을 눈치 챌 수 있는데, 이 그래프가 일직선을 그리며 누군가 사망했음을 알리자 ‘DEATH AT A FUNERAL’이라는 타이틀이 그 선 위로 나타난다. 심장박동 그래프로 시작된 이 빨간 선은 관에서 관이 실린 차로, 다시 차에서 장례식장까지 가는 여정으로 변한다. 드라이브 쓰루 버거가게에서 멈춰 버거도 사고, 세차도 하면서 말이다. 장례식이라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시간에도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은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밀린 세금을 내러 간다. 애도의 시간을 보낸 뒤에는 상실의 아픔을 추스르며 일상으로 돌아온다. 끝이 또 다른 시작인 것처럼 죽음과 삶 또한 분리된 것이 아니며,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 또한 지극히 인간다운 모습임을, 그리고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 삶의 본질인 것을 오프닝 시퀀스는 말해주고 있다.

차이를 용납하는 사랑의 삶

오프닝 시퀀스에는 장례식이라는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익살스럽고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노랫말은 인생에 어떤 일이 닥쳐오더라도 부정적인 감정에 묻히지 말고 그 상황을 극복해내라고 우리를 응원한다. 이 노래는 1967년 결성되어 여러모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전설적인 밴드, 슬라이 스톤Sly Stone의 <Life>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
’라는 마샬 맥루한의 말을 빌리면, 슬라이 스톤은 그 존재 자체로 메시지다. 남녀 혼성인데다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이 밴드는 흑인 음악과 백인의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결합해 흑백 크로스오버의 시초가 되었으며,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고 외쳤다.
영화의 끝에서 결국 아버지의 비밀이 폭로되고, 장례식장이 난장판이 된 그 순간. 아론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꿈을 좇으라고 하신 아버지를 추억하며 즉흥적으로 조사弔詞를 시작한다. 그는 누구도 판단하거나 험담하지 않았고, 인종·종교·성별에 대한 어떤 편견도 없었던 그분을 자신의 아이가 반만 닮아도 축복일 것이라고 말하며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비밀을 긍정한다. 낯설더라도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 결국, 이것이 슬라이 스톤의 메시지인 동시에, 감독이 관객들에게 함께 꾸고 좇자고 권유하는 꿈이 아닐까. 이는 다인종사회라는 미국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나라 사회에도 유효한 권유일 것이다. 늘어가는 국제결혼과 혼혈인 2세들, 외국인 노동자들이 더는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여전히 그들은 배타적인 시선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소수자이자 이방인,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다.

성경은 늘 죄인과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셨던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이
방인에게, 간음한 여인에게, 가난한 자에게, 과부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그리고 무려 제 2계명으로 서로 사랑할 것을 명하시며‘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그럼에도 당신은 자신의 마음속에 사랑할 수 없다고 금을 긋게 하는 대상이 있다면, 이 영화를 꼭 보기 바란다. 그러면 이 왁자지껄한 소동극에서 미세하게 들려오는 그분의 명령을 곱씹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글 새롬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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