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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고전으로 오늘을 읽다

진리를 깨달은 이의 숙명 │ 플라톤의 <국가>





영화 <매트릭스>에서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는 가상현실을 
빠져나와 실제 세계로 건너온 주인공에게 이렇게 인사합니다.
“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허위에 맞서는 진실의 주둔지는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인 것 일까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마태복음 5장 10절).” 그리스도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수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 전체로 이를 입증했으니까요. 십자가는 진리의 길을 걷는 이의 운명에 대한 절절한 상징입니다. 플라톤의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진리는 자신을 만난 이에게 외로움과 고난을 남겨두고 갑니다. 진리를 쫓는 삶이란 허위가 주는 안식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빛을 컴컴한 동굴 속에서 그려내는 일이니까요.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348)은 서양역사를 통틀어 첫 손가락에 꼽히는 철학자입니다. 그 명성이 얼마나 높은지 철학을 전혀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그의 이름만큼은 알 정도입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 2,000년은 모두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 할 뿐’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유명한 철학자이니 그의 책은 또 얼마나 어려울까 걱정된다고요? 걱정 마세요. 그의 책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그 어떤 철학책보다 쉽습니다. ‘대화편’이라는 서술방식 덕분입니다. 그는 당대의 실존 인물을 등장시켜 각각의 인물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고 그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책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는 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드라마입니다. 그는 전문적인 철학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난해한 사변을 지루하게 늘어놓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문적인 철학용어들, 가령 실체, 본질과 같은 용어들은 대부분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플라톤은 재미있는 이야기꾼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야기의 힘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참된 진리가 논리에 의해 다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지점에 다다르면 신화와 비유적 설화의 도움을 받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가 된 마법 반지 이야기를 담은 ‘기게스의 반지’나 뮤지컬 <헤드윅>에 나오는 ‘The origin of Love’라는 노래의 원전인 ‘사랑의 기원에 관한 신화’처럼 그의 글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이유입니다.
 
<국가>에도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동굴의 비유’입니다.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진리를 깨달은 이의 태도와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플라톤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까요? 동굴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동굴 벽만 쳐다볼 수 있게 묶여 있습니다. 그들 뒤에 불이 놓여 있고 그 불 앞으로 여러 모양의 인형들이 지나다닙니다. 그 모습은 고스란히 동굴 벽에 그림자로 비췹니다. 동굴 벽만 바라볼 수 있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그림자가 ‘실제(real)’라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우연찮게 포박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가지요. 그리고 ‘진짜(real)’ 세상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지금껏 그림자를 실물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는 것도 알지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제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동굴 밖으로 나와 진리를 깨닫고 자유를 얻었으니 홀로 행복하면 그만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동굴 안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리고 진리를 전하기 위해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갑니다.
 
“어떤가? 이 사람이 최초의 거처와 그곳에 있어서의 지혜 그리고 그 때의 동료 죄수들을 상기하고서는, 자신의 변화로 해서 자신은 행복하다고 여기되,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라고 자넨 생각지 않는가?” _<국가> 중에서

 
이게 진리를 깨달은 이의 태도입니다. 진리를 깨달은 이는 혼자 진리를 독식하지 않습니다. 해방의 참 기쁨을 안 이는 홀로 해방된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을 맛본 이는 언제나 그 사랑의 식탁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동굴로 돌아간 이후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원래 그 사람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해주기 위해 다시 어두컴컴한 동굴로 돌아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동굴 속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을 욕하고 때리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점 또한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런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가서 이전의 같은 자리에 앉는다면, 그가 갑작스레 햇빛에서 벗어나왔으므로, 그의 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게 되지 않겠는가? 어둠에 익숙해지는 이 시간이 아주 짧지는 않을 것이기에, (동굴 속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는 비웃음을 자초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에 대해서,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기들을 풀어 주고서는 위로 인도해 가려고 꾀하는 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일 수만 있다면, 그를 죽여 버리려 하지 않겠는가?”_<국가> 중에서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와서인지 그는 동굴 속 사물을 잘 보지 못합니다. 비유적으로 읽자면 진리를 깨달은 후 오히려 삶에 더 서툴러졌다는 말입니다. 그런 그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하고 다니니 동굴 속 사람들은 기가 막혔나봅니다. 거짓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주제에 누굴 가르치냐고 조롱하고 비난합니다.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이게 진리를 깨달은 이의 운명입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진리를 오늘 살아낸다는 건 무척 힘든 일입니다. 누군가의 노래처럼 ‘미래에서 온 편지를 받은 이는 외롭기 마련’이니까요. 진리를 따르는 것은 달콤한 사탕을 고르는 일이 아닙니다. 그 말이 주는 경쾌하고 밝은 느낌과 달리 ‘진리’는 자신 뒤편에 고난과 고독을 숨겨두고 있습니다.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안전하고 보장된 미래가 있는 미국을 떠나 히틀러 치하의 독일로 돌아가며 한 편지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제가 미국으로 온 것이 잘못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독일의 기독교인들과 독일의 어려운 시기 동안 내내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심했습니다. 독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저도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이후에 독일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저에게는 없다고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_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쓴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
가 필연적인 고난의 수용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진리의 길을 걷는 이에겐 반드시 찾아오는 숙명입니다. 그러니 진리 때문에 고난 받는 이가 있다면 ‘기뻐하고 즐거워(마태복음 5장 12절)’하십시오. 또한 만약 진리를 따르고자 결심한 분이 있다면 당당히 고난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그 고난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 것 입니다.
 
“십자가는 불운과 가혹한 숙명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속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다. 십자가는 우발적인 고난이 아니라, 필연적인 고난이다. 십자가는 자연스러운 생활 때문에 겪는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다가오는 고난이다... 따라서 고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표지가 될 것이다.”_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중에서 

김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