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을 읽다/영화 속 현실과 만나다

구호에 담긴 불편한 진실 │ 밍크코트(Jesus Hospital)

평소 형제들 사이에서 무시당하고 따돌림을 당하던 현순(황정민). 
어느 날 노모가 쓰러져 의식 불명이 되자 현순의 형제들은 연명치료 중단을 결심한다. 노모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도 응답을 받은 현순은 형제들에 맞선다. 그러나 현순의 신앙은 어딘지 비밀스럽다. 형제들은 현순이 ‘ 이단’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은밀하게 작전을 짜고 현순의 딸 수진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들의 작전은 순탄치 않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과연 신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영리한 문제작
<밍크코트>는 영리한 영화다. <Jesus 
Hospital>이라는 부제가 드러내듯 참회, 대속, 보혈 등 명확히 기독교적으로 읽히는 스토리 라인과 상징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종교와 가족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주제다. 그러나 기독교적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더라도 가족, 사랑, 화해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성찰할 수 있는 영화다. 또한 노모의 연명치료 중단을 두고 현순과 형제들이 벌이는 긴박한 분투는 스릴러의 장르적 재미도 준다. 여러모로 의미를 짚어낼 수 있는 동시에 넓은 범위의 관객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영화가 무거워지려할 때마다 노모와 한 병실을 쓰는 환자와 현순의 사위인 정수가 웃음을 주어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조절하는 노련함까지 갖췄다. 그러나 극도로 얕은 심도와 타이트한 숏사이즈(shot size), 핸드헬드(handheld) 촬영 기법은 이 영화의 장점으로 꼽히는 동시에 가까이서 보는 관객에게 어지러움을 유발할 수 있는 단점도 된다. 되도록 스크린에서 멀리 떨어져서 관람하기를 권유한다. 어쨌든 <밍크코트>는 2012년 웰메이드 독립영화, 놀라운 데뷔작, 문제작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만한 수작이다.

<밀양>과 <밍크코트>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아들을 잃은 상처를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다는 전형적인 간증을 하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상처를 애써 감추고 자신을 추스르려는 절박한 자기최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신애는 알고 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교도소를 찾아가지만, 범인은 도리어 신에게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대답한다. 신애는 신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분노한다.
신애와 달리 <밍크코트>의 주인공 현순은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자신한다. “내가 말씀 다 받았어.” 현순은 자신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가족에게 섬뜩하고 날 선 경고의 말로 되돌려준다. “형부, 그렇게 돈, 돈 하다 몸에 불덩이 맞으니까 당장 회개시켜.” 영화의 후반부로 흘러가며 형제들에게 쏘아붙였던 현순의 저주는 현실이 된다. 그래서 현순은 통쾌했을까? 아니다. 다른 무엇이 아닌 자신의 믿음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아이러니, 그 이율배반적 상황. 그녀는 차라리 자신의 신앙이 틀렸기를 바랄 만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신애와 달리 현순은 신을 향해 분노할 수 없다. 다만 신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오열할 뿐이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디모데전서 5장 8절).” 
<밍크코트>는 쉽게 외치는 보편적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가족 간에서조차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영화는 이 어려움을 정직하게 그려내면서도 비관에 빠지지 않는다. 영화 말미 잠든 현순을 바라보는 딸 수진의 표정이 그 증거다.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면서 서로에 대한 연민과 긍휼의 마음을 품는 것. 신이 현순과 그 형제들에게 바랐던 것은 어쩌면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구호에 담긴 불편한 진실 
가까이로는 교회의 표어부터 시작해서 멀리는 TV 공익광
고까지 우리 사회는 구호를 외치고, 외치고 또 외친다. 기실, 구호가 생겨나는 이유는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랑, 평화, 정의 등의 보편적인 가치는 시대를 초월해 존재해왔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어렵다. 그런가 하면 구호는 그 시대의 문제와 고민을 반영한다. 1970년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2000년대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은 동생입니다’로 바뀌었듯이 말이다. 
그러나 구호를 외치는 이는 정작 자신을 구호의 실천 대상에서 분리하게 마련이다. <밍크코트>에서 현순은 극 초반 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 ‘네 형제를 사랑하느냐’는 신의 물음에 직면한다. 그녀는 그때 이미 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대답하며 막다른 상황에 도달하기 전까지 자신을 속이고 현실을 외면한다. 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다고 자신하는 그녀가 말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남에게는 관대하나 자신에게 엄격하게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그 구호들은 끊임없이 지켜야 할 것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구호를 들은 이들이 자신을 반성하고 노력하는 동안 이를 요구하는 주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들은 지켜야 할 선(線)바깥에 서 있다. ‘그들’로 지칭된 것은 바로 ‘권력’이다. 공익광고의 긍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갑갑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왜일까. 권력의 필요에 따라 그 때 그 때 강조되어야 할 것들이 공익광고라는 형태로 새로이 생겨난다고 하면 너무 음모론의 냄새가 풍길까. 그러나 권력의 교묘한 작동 방식은 이미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등 그의 많은 저작을 통해서 샅샅이 파헤쳐진 바 있다. 공익광고가 외치는 수많은 구호와 가치들은 어쩌면 광고를 만들라고 주문하는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글 최새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