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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한페이지 단편 소설

한밤의 아이스크림 트럭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어딘가에서 작은 종소리가 울린다. 풍경 소리보다는 크고, 구세군 종소리보다는 작다. 한
밤에 종종 이 소리를 들었지만 일어나기 귀찮아 도로 잠이 든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잠들기 전에 진한 커피를 마셔서 정신이 또렷하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 같은 그 소리.
휴대폰을 보니 새벽 두 시 반. 자리에서 일어나니 다리가 후들 거린다. 소파에 있는 외투를 걸친다. 봄이라고 하지만 새벽은 아직 춥다. 보동이가 이때쯤 멍, 하고 짖어야 하는데 조용하다.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슬리퍼를 질질 끌고, 현관문을 연다. 종소리가 들리는 곳은 골목 안쪽이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이 가로등만 환하게 켜져 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 친다. 골목을 돌자, 트럭 한 대가 나타난다. 하얀 색의, 앙증맞게 작은, 중간에 창문이 열려 있는 트럭이다. 창문 사이로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트럭 위에 달려 있는 스피커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있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차체를 분홍색, 노란색 아이스크림 그림으로 가득 채웠다.
나는 걸음을 멈춘다. 창문 앞에 서넛의 무언가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혀를 낼름거리면서 첩첩 소리를 낸다.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키가 작다. 좀 더 가까이 가 본다. 이상하다. 다들 옷을 입고 있지 않다. 털이 많다. 발톱도 보인다.
“어이쿠. 우리 주인 아저씨가 납시었네.” 그 중 하나가 말한다. 보동이다. 뒷발로 서서, 앞발은 마치 기도를 하는 자세로 아이스크림을 잡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듯이 혀로 핥는다. 그 옆에는 얼룩 고양이, 하얀 토끼, 불독이 비슷한 자세로 서서 맛있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여기서...뭘 하는 거야? 말을 할 수 있었어?” 얼룩 고양이가 보동이의 옆구리를 툭, 친다.
“골치 아프게 생겼네. 가끔씩 이 시간에 깨어나는 인간이 있다니까. 야, 네가 책임져. 야옹.” 보동이는 뒤뚱 뒤뚱 두 발로 내게 돌아온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이게 다 아이스크림 덕택이니까. 매주 목요일 새벽, 트럭이 오거든요. 종소리가 울리면 동물들이 다들 이리로 모여요.”
“종소리 때문에 나도 깬 건데.”
“이상하다. 동물만 아이스크림 트럭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고주파라서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거든요.”
“그런가.” “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매일 같은 사료만 먹는 다고 생각해 봐. 토할 것 같아.” 얼룩 고양이가 말한다.
“그래도 너희들은 집을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잖아. 나처럼 하루 종일 철장 안에 갇혀 있어봐.”
하얀 토끼가 한 마디 거든다.
“우리 주인 녀석은 말이야.”불독이 그르렁 거린다.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걷어찬다고.” 그리고 다들 보동이를 쳐다본다. 보동이는 나의 눈치를 본다.
“뭐, 나는 그럭저럭 별일 없이 지내는 편이지.” 요즘에는 먹다 남은 고기도 주고, 산책도 자주 시켜주는 편이다. 추우면 같이 이불 속에서 자기도 한다.
“그나저나 아저씨는 어떤 맛?”
“으응?”“ 아이스크림 말이에요.”
“노..녹차 맛도 있나?”“ 그럼요.”
“잠깐, 나 돈을 안가지고 왔는데.”“ 걱정 마세요, 달아놓으면 되니까.”
“고마워.” 트럭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커다란 북극곰 한 마리가 야구 모자를 쓰고 닌텐도 게임을 하고 있다. 잡으면 부서질 것 같은 콘에 야구공만한 아이스크림 턱 하고 얹혀 나왔다. 달콤하지만 쌉싸름한 녹차 맛이 개운하게 입에서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을 반쯤 먹자 정신이 몽롱해졌다. 얼굴에 차가운 것이 뚝 뚝 떨어졌다. 눈인가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눈을 뜨니 침대다. 꾸리한 냄새가 난다. 이불을 들쳐보니 보동이가 쌔근 쌔근 잠들어 있다.
“야, 일어나. 말 좀 해봐.”엉덩이를 툭툭 쳐봐도 꿈쩍하지 않는다. 입을 커다랗게 벌리면서 하품을 할 뿐이다. 목줄을 매고 바깥으로 나섰다. 보동이는 억지로 따라왔다. 아이스크림 트럭이 서 있던 자리에는 노란 개나리가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보동이는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싸기 시작한다. 아주 길게. 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어쩌면 봄이 오는 소리 인지도 모른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서진|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일명, 한단설 1pagestory.com)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한겨레 문학상 수상.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헤매는 북원더러Book Wanderer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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