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봄, 봄. 봄이다. 온통 하얗던 땅에 솟아나는 새생명의 기운에 가슴이 설레는 봄이다. 겨울의 시작 즈음에 이사 와 꼼짝을 못했는데, 봄이 되면 겨우내 끼고 있던 두 딸을 내보내고 아직 둘러보지 못한 집주변을 다니며 나물을 캐야지! 아 텃밭 땅도 갈아야지! 글도 써야지! 하고 수많은 결심과 기대가 밀려오는 봄이다!
 
내게 봄이 아름답게 다가온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남들이 한창 때라고 말하는 20대 초중반에 나는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 지하철 사고가 안 나나, 우리집은 불이 안 나나, 어떻게 하면 이 고단한 몸을 쉴 핑계를 얻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남들 두세 번은 연애하고 헤어졌을 나이에 뒤늦은 연애를 시작했다.
대학을 다닐 때는 어차피 직장을 서울로 잡을 테니 부산에서 연애할 수 없다고, 직장을 다니면서는 연애할 틈이 없다는 핑계로 연애를 안 했다. 솔직히 내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더라도 누군가 열렬히 따라다니거나 목을 맸다면 왜 연애 한 번 못 했을까! 드라마에서는 평범한 아가씨에게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멋진 놈이 줄을 서더만 현실에선 한 놈도 없었다. 평범하게 보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한 여주인공에 비해 매력이 없는 게 주요한 이유였겠지만 곰곰 돌이켜보면 난 사랑이 두려워 아끼면 똥 될 내 사랑을 아끼고 또 아꼈다. 살면서 한 사람에게 몰빵해 주고 싶어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지 않았다. 간절히 그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 간절함만큼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현실보다 항상 더 진도가 나가 있는 교회 안에서 무섭기도 했다. 나는 흠도 없고 티도 없는 과거를 가진 깨끗한 자매가 되고 싶었다. 이렇게 용기도 없고 사랑에 인색한 사람이 이것저것 가리기까지 하다 보니 내겐 연애가 결혼만큼 어려웠다.
나이가 들면 기운도 꺾이는 것일까. 20대 후반에 접어든 내게 한 형제가 교제를 신청했다. 신실한 자매들이 그러하듯 나는 100일 기도 후에 만나자고 제안했고 정확히 100일 만에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만인지 모르지만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사람 잘 챙기는 속 넓은 리더의 탈을 쓴 나를 보고 반해 다가왔다가 3개월 후 맹비난하고 나를 떠났다.

지금이야 그 모든 것들이 약이 됐노라 고백하지만 당시에는 참 많이 아팠다. 사랑을 놓친 데서 오는 아픔도 아
픔이지만 내게 던진 상대방의 모진 말에 속이 만신창이가 되어 일어설 힘이 없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나는 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인지 철저히 깨닫게 되었다. 장안의 글쟁이 김두식 교수도 자신을 인간 만든 게 교회와 실연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아프지만 가장 행복하게 인간되는 건 실연이 최고다.
연애를 하는 동안은 연애하느라 기운 빼고 연애를 하지 않을 때는 어떤 사람을 만날지 고민하느라 기운 빼던 세월과 실연을 거쳐 나는 29살이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바닥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나를 마주 대하며 시간을 보냈다. 바닥을 치고 나니 기도가 정직해졌다. 이른바 성육신한 기도... 나의 모든 걸 다 아시는 분 앞에서 감추려했던 꼼수도 하나씩 내려놓았다. 오랫동안 해 왔던 교회 봉사도 내려놓았다. 봉사를 그치면 천국 명단에서 이름이 지워지기라도 하는 양, 불신 가정인 우리 가정의 구원이 멀어지는 양 주말은 온전히 교회에서 보내며 10대, 20대를 보냈다. 물론 리더 정도는 해야 신앙 좋은 형제를 만날 것 같은 불안감도 한몫했다. 그 리더의 자리를 ‘이 나이에 내가 리더하리!’ 하고 던져 버렸다. 봉사하지 않는 성도의 삶을 처음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늘 마음으로 하고 싶었던 책읽기 모임에 나갔다. 신실한 자매의 모습과 그 자리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면 믿음에서 떠날까 두려워 놓지 못했던 포장들을 하나씩 벗고 내 모습, 내 길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나의 20대는 봄에 가깝기보다는 겨울에 가까웠다. 홀로 보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면서도 누군가를 만나야 
삶이 완성되고 피어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았다. 동동거려도, 될대로 되라 하고 당당하게 살았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는 누구를 만날지 몰라 내 삶의 방향을 정할 때조차 머뭇거리곤 했다. 그렇게 좋은 시절 다 보내고 20대의 끝자락을 붙든 나이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한쪽 구석에 처박혀있던 내 인생을 주의 깊게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봄이 오면 봄 처녀들 가슴에 바람이 분다. 그러나 그 바람은 마음에 머무를 뿐 삶에까지 영향을 끼치지 못할 때가 많다. 또 한 살이 늘어난 것에 대한 부담감,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교회. 포기하기엔 기다린 세월이 아깝고 기대하기엔 받을 상처가 두렵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무엇? 바로 일탈할 수 있는 용기! 정해진 룰대로,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길대로 살아온 건 이제까지 삶으로도 족하다. 누군가를 위해서 마냥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나 홀로 스스로 완성해가는 온전한 삶은 그리 어렵지 않다. 손 놓으면 벼랑일 것 같지만 넉넉히 착지할 수 있는 땅이다. 싱글들은 짝 없는 독신의 삶이 늘 미완성인 것 같고 결혼을 해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삶은 아이를 주렁주렁 낳고 키우느라 이름을 잃어버린 아줌마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결혼은 완성이 아니다. 결혼하면 새 삶이 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싱글이든 아줌마든 개개인의 삶을 완성해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부부는 각자의 삶을 가꾸어야 하고 따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찾아야 둘이서도 행복하다. 행복한 결혼이 인생의 답인 양,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 나의 소중한 삶의 조각들을 멀리 내던졌다면 얼른 가서 그 조각들을 주워다 내 삶의 퍼즐을 맞추어보자! 이 다가오는 봄에는 세트로 다니는 이들 앞에 쫄지도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고 혼자서 멋지게 바람 한번 나보자!

이경희|필명 조각목, 소싯적 옷 만들고 책 만들다 결혼 후 마님으로 살면서 음지에서 야매상담가로 맹활약 중. 바느질에 관심을 쏟다가 목 디스크 때문에 그만두고 페이스북 에서 수다 떨듯 글을 쓰다가 최근 작가와 출판전문기획자를 동시에 해보기로 결심함. 여성의전화 소식지 기획위원, 지역신문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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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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