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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어른이 된다는 것

허리디스크를 조심하세요!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함께 있어 정치계의 움직임이 심상치않습니다. 이미 표심을 잡기 위한 여러 제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청년을 향한 제안은 파격적입니다. 청년비례대표직을 제안했거든요.

가능할까, 반신반의하면서도 자리를 얻으면 그만큼 더 발언 기회가 생길 거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유가 어찌됐든 청년을 참여자로 대우하게 되었다는 건 알 수 있지요. 오래전부터 청년, 곧‘ 청춘’은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청춘’을 위한 수많은 책과 콘서트가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떨까요?

청년의 대타 인생, 맘에 드십니까?
청년은 자주 교회의 허리로 비유됩니다. 허리가 튼튼해야 몸이 건강하다고, 청년도 주일학교와 장년부를 잇는 교회의 허리로 튼튼하고 힘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무거운 물건을 들면 허리에 무리가 오듯, 교회에 중차대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청년은 무리하게 됩니다. 전도대회, 전교인 수련회에서 청년의 역할은 엄청납니다. 게다가 애매한 특송 순서, 교회 청소, 찬양 인도, 절기 행사 등에도 “팔팔한 청년이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이 한 마디로 해결됩니다. 틀린 말이란 건 아닙니다. 다만, 언제나 대타여야만 하는 교회 내 청년의 현실을 생각해보자는 거지요.
청년이 대타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교회의 큰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인 제직회나 공동의회에서 청년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습니다. 제직회는 직분을 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해도, 세례교인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한 공동의회에서도 청년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청년도 자격이 있는지 몰랐을까요? 글쎄요, 교회의 임직자 선거가 있을 때면, 끌려나와 앉아 있습니다. 교회 예결산을 발표하는 자리는 어떨까요? 네, 언뜻 생각하면 이 모든 일은 청년부와 크게 상관없는 일 같습니다. 청년부는 자체적으로 청년회를 진행하니까요. 하지만 교회의 일을 장년부만의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어른이 정한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청년만을 위한 건 청년을 위한 게 아닙니다 
교회는 종종 청년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직도 청년은 교회가 신경 쓰고 관리해야 할 존재입니다. 이 시선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인데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몇 부로 나누어 드리는 큰 교회의 마지막 예배는 대개 청년을 위한 예배인 경우가 많고, 교회 중엔 청년만을 독립시켜 젊은이 교회를 세운 곳도 있습니다. 청년만의 자치와 특색을 살리고자 하는 시도는 새로운 예배와 교회의 모습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고, 청년의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청년은 고립되었습니다. 청년은 청년을 위한 예배를 찾고 청년만을 위한 교회로 갑니다. 일만 시키는 교회에 비하면 청년이 주축이 되어 움직일 수 있는 교회는 분명 매력적이지요. 청년이 몰리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 세대, 특정한 계층만이 압도적으로 많은 교회는 건강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서로 쉽게 이해할 순 없더라도 함께 모여 삶을 나누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도움이 될 때에만 찾는 관계는 비즈니스일 뿐이지요.

갓난아기는 엄마 품이 필요하지만 언젠가는 젖을 떼고 
혼자 일어서야 합니다. 청년만의 공동체를 통해 교제와 교육의 시간을 가져야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고개를 들어 교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계에서 청년을 바라보게 된 건 그저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청년이 그만큼 정치적 소신을 가지고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걸 먼저 알렸기 때문이지요. 청년의 소리가 제대로 들릴 때, 교회도 청년을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게 될 겁니다. 청년이 교회의 허리라면 지금의 우린, 너무 아픈 겁니다. 글 원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