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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TV 상자 펼치기

왕족의 전성시대



때 아닌 왕족들의 전성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올 초에 <해를 품은 달>을 통해 김수현이 최고의 스타로떠올랐고, 바로 뒤를 이어 <더킹투하츠>에선 이승기가 왕의 동생에서 왕으로, <옥탑방 왕세자>에선 박유천이 현대 한국으로 날아온 조선 시대 왕세자로 등장하고 있다.


드라마 속 남자들은 점점 더 완벽해지고
작년 초에 최고의 화제작은 <시크릿 가든>이었다. 이 작품에선 현빈이 당대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는데, 극 중에서 맡은 역할은 재벌 3세였다. 현빈 말고도 작년엔 드라마에서 유독 재벌들이 많이 등장했었다. 예컨대 2011년 7월 기준으로 일일드라마엔 퀸스그룹의 황태자가 등장하고, 월화드라마엔 몬도그룹 후계자와 호텔이나 패션회사의 사장들, 수목드라마엔 수조 원을 굴리는 자산운용가 2세, 주말엔 우경그룹 2세, 진성그룹2세, 은성그룹과 수조 원을 가진 사채왕 2세 등이 나왔고 그 외에도 준재벌 수준의 집안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등장했다.
작년 재벌 캐릭터의 특징은 점점 완벽해진다는 것이다. 재벌 2, 3세들이 얼굴도 잘생기고, 팔다리도 길고, 마음도 착하고, 머리도 똑똑하고, 전문분야의 능력도 출중하고, 여자에 대한 순정도 있고, 사람의 소중함을 아는 존재로 그렸다. 작년에 가장 주목받았던 재벌 3세 캐릭터인 현빈에게서 그런 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은 평소 거의 하는 일이 없는데도 백화점에서 평생 일했던 중역들보다 경영 능력이 뛰어났고, 아무 가진 것 없는 여주인공인 하지원을 자기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포용하는 따뜻한 마음도 지녔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약간의 까칠함’이나 트라우마로 말미암은 정신적 이상 증상뿐인데, 대체로 여주인공이 그런 점을 고쳐주며 맺어지는 설정이다. 이렇게 성격상의 작은 결함만 있는 완벽남 캐릭터가 재벌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올해는 급기야 봉건적인 왕족에까지 이른 것이다.
드라마 속의 남성 캐릭터가 이렇게 지나친 완벽남으로 발전한 것은 2000년대에 접어든 이후부터다. 2000년대에 우리 사회의 물질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가 극에 달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민생경제는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황금 궁전’ 안에 사는 남자에 대한 동경이 폭발했고 그것이 드라마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등장하는 왕족들은 재벌 2세 실장님 캐릭터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질 뿐
문제는 우리 현실엔 이런 ‘왕자님’이 없다는 데 있다. 드라마가 이렇게 현실에서 완전히 멀어지면, 그런 드라마에 감정이입하며 사는 시청자들의 마음도 현실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현실에는 거의 없는 화려한 삶에 익숙해지는 가운데에 정작 자기 현실은 더 남루하게 느끼는 것이다. 미국에서 불행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TV를 많이 보는 경향이 있다는 조사 결과를 어디선가 본 듯하다. 이런 비현실적인 드라마들이 헛된 환상과 물질주의를 자극하고, 그것이 행복감의 저하로 이어지는 구조다. 왕자님과 로맨스에 익숙해진 사람이 결혼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지금은 ‘88만 원 세대’의 시대다. 젊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즐겨보는 드라마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해지고 있다. 아무리 드라마가 판타지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하재근| 날라리의 기질과 애국자의 기질을 동시에 타고났다. 그래서 인생이 오락가락 이다. 어렸을 때 잠시 운동권을 하다, 20대 때는 영상 일을 했었고, 30대 초중반부터 다시 운동권이 됐다가, 요즘엔 다시 날라리로 돌아가 대중문화비평을 하고 있다. 때때로 책도 쓰며 인터넷 아지트는 ooljiana.tistory.com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