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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한페이지 단편 소설

지구를 지키는 소년

지구를 구하는 건 만만찮다. 그렇다고 초등학교 5학년을 다니는 것이 그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숙제도 저학년 때보다 늘어났고 가야 할 학원도 하루에 두 개다. 부모님이 지구 방위 본부, 정확하게는 한국 지부의 부산 지회와 어떤 거래를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보통 아이처럼 학업이 충실할 것을 본부가 약속했다는 건 틀림없다. 나같이 중요한 인물은 지구만 지키면 되지 않을까? 남는 시간엔 좀 쉬자. 피곤하다. 

부르르르 부르르르르, 진동인지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신호가 울린다. 영어 회화 학원에서 졸다가 전화를 받았다. ‘익스큐즈 미’ 라고 원어 강사에게 웃음을 지으며 학원 복도에서 전화를 받았다. 
“지구 방위 본부다. 오륙도 앞바다에 괴수 고래가 출현했으니 당장 출동해주길 바란다. 낚시꾼 두 명이 조난당하고 근처를 지나던 컨테이너선이 전복했다.” 
아이 씨, 또 괴수 생물이다. 이번 달 들어 두 번째다. 게다가 고래라니! 이런 건 군함이 나서서 대포 몇 발 쏴주면 해결되지 않나? 아, 참 지난번에 거대 문어에 군함 한 대가 통째로 침몰한 뒤로 본부는 군력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럴 때 북한이 잠수함이라도 출동시키면 우리 바다는 누가 지키냐는 거다. 그럼, 또 초등학생인 나, 오태평이 나서야 하는 거다. 
일단 택시를 타고 박사님에게 달려갔다. 택시비는 당연히 본부 카드로 끊었다. 이럴 때 비상금을 털었다가는 정산하는 걸 깜빡할 수 있다. 지난번에 이 카드로 최신 건담 프라모델을 산 건 비밀. 
“태평군 어서 오게. 슈트를 준비해 놨네. 이번에 새로 개발한 무기에 대해 설명을 좀 해줄까?” 
박사님은 코가 빨갛게 되도록 술을 마셨나 보다. 적이 안 나타날 때가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계속되는 날에는 괜찮지만 이런 날에도 취해 있는 건 곤란하다. 
“됐어요, 됐어. 빨리 출동 안 하면 반성문을 써야 한단 말이에요.” 
“돌아올 땐 마트에 들러 일본 정종 한 병 부탁하네.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고 있겠지?” 
나는 못 들은 척 하고 초합금 슈트를 걸치고 충전된 전기드릴과 로켓 엔진을 매고 출발했다. 짜장면을 배달하는 형들이 오토바이를 타는 걸 재밌어하는 것처럼, 지구를 구하는 나는 하늘을 날 때가 가장 재밌다. 박사님 연구소가 초읍 어린이 대공원에 있으니까 시속 300킬로미터로 오륙도까지 날아가면 채 5분도 안 걸린다. 쉬익, 쉬익, 쉬이이이이익. 
오륙도에 도착했을 땐 선착장에 사람들이 한가득 몰려 있었다. 경찰과 119 대원들이 총출동했지만 그들도 내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거기 있어 봤자 신경만 쓰인다구요! 라고 외치고 싶지만 이럴 때엔 천진난만한 초딩처럼 웃어줘야 한다. 그래야 본부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으니까. 자신들을 구해주는 데도 요즘 사람들은 본부에 불만을 터뜨린다. 퇴근 시간에는 차가 막히니 제발 전투를 하지 말라나. 
고래는 오륙도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섬 사이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열 척이 넘는 컨테이너선이 항구로 줄행랑을 치고 있었는데 그걸 본 고래가 먹이라도 발견한 듯 유유히 헤엄치기 시작했다. 동해 멀리서 놀아야 하는 녀석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크기가 세 배는 더 커지고 다섯 배는 더 포악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핵발전소가 없지만 수년 전만 하더라도 고리에 오래된 핵발전소가 있었단다. 그걸 폐쇄하기는 커녕 새로 지으려고 했다니 할 말이 없다. 아무튼 사고 이후 광안리의 회센터가 망한 것은 물론이고 바다에는 이런 괴수들이 곧잘 출현하니 나만 피곤해진 거다. 하지만 나는 지구를 지키는 소년 오태평, 냄새가 나도, 힘이 들어도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방사선에 오염된 생물을 처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일곱 명의 소년 소녀 밖에 없으니까. 핵발전소 사고가 있던 그 날, 동네 주변에 살고 있던 유치원생 삼백 명 중 살아남은 일곱 명 만 유전자 변형을 일으켜 파워를 얻게 되었다. 이미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또 다시 오염될 걱정이 없다. 하지만 본부에서 받은 월급도 죄다 치료비로 쓰이기 때문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지구를 구하는 소년. 친구들은 부럽다고 하지만 나는 학업과 지구 방위, 두 가지 업무 때문에 미친 듯이 바쁜 초등학생일 뿐이다.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할 시간이 없다. 드릴을 머리에 부착하고 최고 속력으로 고래로 돌격!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기름기 가득한 고래의 두꺼운 피부를 뚫어 버리려 출격!





서진|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
(일명, 한단설 1pagestory.com)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 헤매는
북원더러(Book Wanderer),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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