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문학은 천박한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에 맞서 숭고한 몰락의 의미를 사유하는 작업이라고 믿어왔다.” 평론가 신형철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만 몰락이 숭고하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내가 본 몰락이란 대부분 아름다운 언어로는 도저히 수식해낼 수 없는 눈물겨운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글을 고쳐쓰자. 문학은 천박한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에 맞서 몰락의 눈물겨움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업이다. 글을 쓸 때는 피와 눈물로 쓰라는 누군가의 말도 덧붙이기로 하자. 그렇다면 여기 무엇보다 문학적인 작품이 하나 있다. 성공의 천박함과 몰락의 눈물겨움을 한 줌의 웃음으로 솜씨좋게 버무려낸 이야기가.


니꼴라이 고골(Nikolai Vasilevich Gogol, 1809~1852)의 소설은 일단 엉뚱하고 재미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을 수 있는 허풍쟁이이다. 그가 소개하는 인물들 또한 죄다 우스꽝스러운 광대들이다. 가령 이렇게.

“오히려 제가 귀하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지극히 명백한 것 같은데요… 굳이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려야 할까요?… 귀하는 바로 제 코가 아닙니까?” 코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소령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실수하고 있소.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오. 더욱이 나와 당신 사이엔 어떤 밀접한 관계도 있을 수 없잖소? 당신의 제복에 달린 단추를 봐도 나와는 다른 관청에 속해 있으니까요. 나는 문관이지만 당신은 원로원이나 법무성에 근무하는 것 같군요.” 코는 얼굴을 돌려 다시 기도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꼬발료프는 너무나 당황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생각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_ <코>

동시에 그의 작품은 깊은 눈물도 머금고 있다. 자신보다 높은 직위를 차지한 자신의 ‘코’ 앞에서 벌벌 떠는 꼬발료프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처롭다.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고골의 소설에 있어 이 말은 정확하다. 그의 이야기에는 희극과 비극이 공존한다. 희극과 비극은 동일한 사건의 양면이며, 웃음과 눈물은 인간의 삶에서 한데 엉켜 구분되지 않는다. 우스꽝스럽기만 했던 인물의 삶 면면에는 차마 웃어넘길 수 없는 눈물이 배어 있다. 그들은 속물적 욕망의 노예이며 거대 도시 속에서 소외된 패배자들이다. 쉽게 흔들리고 쉽게 무너지는 나약한 소시민들이다. “그 웃음의 배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느낀다”던 뿌쉬낀의 평이 적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가령 50세가 될 때까지 꾀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을 한 하급관리가 외투 한 벌 살 돈이 없어 벌벌 떠는 모습을 어떻게 웃어넘길 수 있을까.

“안 되겠는데요, 못 고치겠어요. 옷이 완전히 망가졌네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그 한 마디에 가슴이 철렁했다. “왜 안 된다는 거야, 빼뜨로비치?” 그의 목소리는 거의 때 쓰는 어린아이 같았다. …… “외투 하나에 150루블이라고!” 가엽은 아까끼 아까끼예비치가 소리를 질렀다. 항상 조용조용히 말하던 그였기 때문에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큰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_ <외투>

이 비극적 희극 뒤편에는 인간의 삶을 그 밑동부터 파괴하는 속물성이라는 괴물이 자리 잡고 있다. 단편소설집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의 배경인 뻬쩨르부르그는 속물성이 지배하는 도시이다. 이 도시에서는 순수한 사랑을 믿던 젊은이는 조롱받아 미쳐 죽고, 유부녀를 희롱하는 난봉꾼은 아무 문제없이 살아간다(<네프스끼 거리>). 예술가들은 황금과 명예를 좇느라 자신의 재능과 삶을 파괴해 버린다(<초상화>). 낮은 직급과 가난한 형편 때문에 사랑을 이룰 수 없는 남자는 짝사랑을 하며 홀로 미쳐가고(<광인일기>), 저녁을 굶어 가며 간신히 마련한 외투를 강도에게 빼앗긴 늙은 공무원은 다른 이들의 외면을 받으며 병에 걸려 죽은 후 외투를 빼앗고 다니는 귀신이 된다(<외투>). 허영심으로 가득한 8급 관리가 코를 잃어버린 후 제일 두려워하는 건 흉측해진 외모 때문에 거액의 지참금을 가진 부인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코>).

“누군가를 비웃는 것은 자신을 비웃는 것이다(Nad kem smeetsja-nad soboj smeetsja).” 고골이 그려낸 인물을 보고 웃는 건 우리 자신을 보고 웃는 것과 같다. 스노보크라시snobocracy. 속물들을 정당화하고 그들의 삶의 형식을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속물 지배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 사회는 스노보크라시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속물성에 대한 연구서를 펴낸 적도 있는 사회학자 김홍중 교수는 “속물주의가 한국 사회 최후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수십 년간의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루며 그에 못지 않게 속물사회라는 괴물도 함께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스노보크라시는 속물성이 유일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 사회, 전통적으로 추앙받던 가치는 사라진 채 외모, 권력, 돈이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한 사회라는 점에서, 우상숭배의 사회이기도 하다. 그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자리는 희미해지고 인간은 우상화된 속물적 가치에 휘둘리고 억압받는다. 고골은 바로 우리의 그런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니 어찌 이 소설을 눈물 없이 읽어낼 수 있을까.

* 판본은 민음사 번역판입니다(조주관 역).


김영수|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50대에도 고전을 읽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50대와 함께 고전을 읽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학교가 아니라 삶을 위해 공부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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