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마다 영화 이야기가 떠다닌다. 그 영화의 리듬이 우리를 얼마나 들뜨게 했는지, 감독의 선택이 옳았다고 할지, 글렀다고 할지. 물론 말없이 걷는 행인도 있다. 말을 잃게 할 만큼 아름다운, 혹은 형편없는 영화를 보았거나, 영화를 머릿속으로 곱씹어 보느라 동행을 잊은 채 입을 다물어 버렸거나. 단풍보다 먼저 계절의 변화를 알리며 도착한 시네필의 축제, 제17회 BIFF(부산국제영화제)의 풍경이다. 수백 편의 상영작 중, 11월에 <오늘>을 받아들 독자들도 빠른 시일 내에 만나볼 수 있는 영화, 올 겨울 개봉 예정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신작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소개할까 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이란의 작가다. ‘이란의 작가’라는 말은 단순히 그의 국적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란은 영화를 특징짓는 미장센 그 자체다. 그런 그가 2010년 <사랑을 카피하다>의 작업을 위해 이란을 떠나 이탈리아까지 가야 했던 것은 자국의 검열 때문이었다. 거대 자본에서 독립하여 자본의 힘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작가들과 마찬 가지로, 많은 작가가 국가 권력에서 자유롭기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카메라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이란 정부의 행태에 항의하는 의미로 해외에서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 2012년 일본으로 날아가 완성한 작품이 바로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다.
도쿄 도심의 고급 바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프레임 밖 어디선가 통화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참 뒤 숏이 바뀌면 휴대전화를 손에 쥔 콜걸 아키코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지금 연인 노리아키와 실랑이 중이다. 노리아키는 동성 친구와 카페에 있다는 그녀의 말도 믿어 주지 않는데다 (물론 거짓말이다), 코앞에 시험이 닥쳤느니 할머니가 갑작스레 방문하셨느니 (이건 사실이다) 하는 그녀의 해명을 불신하며 끈덕지게 만남을 종용한다. 이어 그녀의 고용주 히로시마저 오늘 밤은 특별 손님을 응대하라며 지칠 대로 지친 그녀를 도시 외곽으로 내보낸다.
아키코가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점잖은 노 교수가 살고 있는 주택이다. 거실 겸 서재에는 로맨틱한 재즈곡 ‘Like Someone in Love’가 흐르는 것이 예상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는 어린 콜걸을 침대에 데려가는 일에는 관심 없어 보인다. 그녀와 식사 하며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졸음에 겨운 그녀가 침대에 파묻혀 버리자 아쉬운 마음에 거실을 초조하게 오갈 뿐이다. 노인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던 카메라는 아키코를 닮은 유화 속 여인과 노인이 한 프레임 안에서 겹쳐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과 애틋함은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관계로 만났는가를 잊게 만든다.
이 밖에도 영화는 키아로스타미 미학이 선사하는 감흥으로 가득 차있다. 최소한의 쇼트와 앵글, 이미지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 준다. 일테면 거의 촉각적이랄 만한 사운드, 달리는 차 안에서 이어가는 대화 등. 여기에 더해 유달리 아름답고 몽환적인 반사 이미지도 다수 등장한다. 곧 유리창에 비친 히로시의 반사 이미지가 아키코 위로 겹쳐 오기도 하고, 차창에 반사된 도쿄의 밤거리가 아키코의 얼굴을 원색으로 물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들 이미지가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우리는 요구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인물의 상황이나, 인물의 곤란에 아랑곳 않고 번쩍대는 도시의 무심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야기는 노리아키가 이들의 관계에 개입해 들어오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사실 영화의 제목은 애초에는 <끝(The end)>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촬영을 마치면서 지금의 제목인 <사랑에 빠진 것처럼(Like someone in love)>으로 바뀌었다. 의혹과 추궁, 거짓 변명 사이의 줄다리기는 야금야금 관계에 실금을 그어갔고, 급기야 쨍그랑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그 순간 끝난다. 섬세하게 흐르던 감정의 결들이 한꺼번에 솟구쳐 올라 마음을 두드리면서. 키아로스타미는 이 커다란 진폭으로 또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김다영 | 독학자. 부산독립영화협회 회원. 윌로씨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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