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소설 <황혼>에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 며느리와 시어머니. 시어머니라기엔 젊디젊고 곱디 고왔던 여자가, 며느리의 ‘노인네’라는 명칭에 하루하루 늙어 가 결국 ‘늙은 여자’에 걸맞은 모습이 되고 만다. 비록 소설의 초점은 여기에 있지 않지만 새삼 말의 무서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들불처럼 일어나는 푸어들
‘푸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종류도 다양하다. 집은 샀지만 빚에 허덕이는 ‘하우스푸어’, 분명 일은 하고 있는데 점점 가난해지는 ‘워킹푸어’, 휘황찬란한 스펙을 가지고서도 회사 현관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는 ‘스펙푸어’, 결혼부터 시작되는 ‘허니문푸어’와 ‘베이비푸어’까지.
‘푸어(poor)’가 뜻하는 바는 단어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한 현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푸어’의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라고 한다. 하긴 어느 통계에서 보니 결혼부터 아이들 양육과 노 후자금까지 드는 돈이 총 13억이라고 하더라. 보통 회사원이 10년간 꼬박 모아야 쥘 수 있는 돈이 1억이라던데, 열세 배나 되는 양이니 어마어마하다.
가난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토익점수를 따는 데 열을 올리고, 스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하고 보는 이유도 좀 더 잘 살고 싶어서다. 빚이라는 인생의 그림자를 자의로 짊어지면서까지 대학원에 진학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좀 더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혹은 좀 더 좋은 배우자를 얻기 위해 우리는 매일 숨 막히게 살고 있다. 그런데 정작 얻은 이름이 중상층도 서민도 아닌, ‘푸어’라니 절로 힘이 빠진다. 뭔가 억울하다. ‘푸어’에 대한 뚜렷한 대책도 없으면서, 열심히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에게 괜한 패배의식만 심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말이 지닌 힘
과민반응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저 하나의 상황을 지적하는 단어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사회현상을 지칭하는 단어가 그냥 생기는 법은 없다. 고대 로마에서는 신권정치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로마가 생각하는 정치는 인간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히브리 민족이 로마 세력 안으로 들어온 후 비로소 이 단어는 로마인의 인식 세계에 자리한다. 이만큼 한 단어의 등장은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특히 입 밖으 로 나온 말은 상황을 가시화하고, 일어나는 현상에 가속도를 붙이기 마련이다. 머릿속에서만 흐릿하게 맴돌던 누군가에 대한 마음이, 친구에게 털어놓는 순간 기정사실이 되고 주체할 수 없이 커지는 것처럼. ‘푸어’가 등장한 이후, 순식간에 종류도 다양한 여러 ‘푸어’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서 공급되는가. 바로 ‘미들(middle)’이라 불리는 중간계층에서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푸어는 리치(rich)라는 반대어를 가진다. ‘부자들’이라는 의미의 리치는 푸어가 양산될수록 그 가치를 높인다. 중간에서 에어쿠션 역할을 해줄 미들이 푸어로 내려앉고 있기 때문이다. 미들은 없는, 푸어와 리치만 존재하는 양극화시대. 이렇게 말로써 먼저 양극화가 시작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말 하나를 감추고 덜 쓴다고 해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멈추거나 사라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푸어라는 단어가 지니는 속사정을 입에 올리는 이유는, 조금이나마 그 진행 속도를 늦추고 싶어서랄까. 어느 특정한 단어의 양산은, 그가 속한 사회의 현시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흐름을 예상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경고성 메시지다. 뒤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재고해 보아야 할 때다. 글 윤지혜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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