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사나이.” 전 세계를 뒤흔든 <강남스타일>의 한 대목입니다. 가수 싸이는 사유가 깊고 사상이 탄탄해야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근육질의 몸짱도 단박에 기죽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비결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따라 ‘고전’이라는 텍스트와 ‘오늘’이라는 컨텍스트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다 보면 자신의 머릿속이 어느새 울퉁불퉁하다고 느끼실 겁니다. 


사랑,을 이야기 하다
오늘은 어떤 고전이냐고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사상을 울퉁불퉁하게 단련하는 날이 아니군요. 오히려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날입니다. 사랑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요.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작품에 대한 해설은 생략하고 극 중 가장 중요한 장면, 그들의 죽음 부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들은 죽어야만 했을까? 바로 이 질문에 사랑의 비밀이 숨어 있으니까요.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 _ 칸트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사람을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언명령이라는 저 유명한 명제를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해봄직 합니다. 누군가를 돈 때문에, 배경 때문에, 다른 조건 때문에 사랑한다면 우린 그걸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수단화하기 때문이죠. 가령 돈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받는 건 돈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날 왜 사랑해?” “음… 그냥… 너니까!” 이게 우리가 원하는 사랑입니다. 만약에 “날 왜 사랑해?” 이랬는데, “네 아빠 부자잖아.” 요딴 식으로 대답하면 바로 ‘절딴’나는 겁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을 향한 순수한 목마름이며, 그 사람을 향한 마음 하나로 다른 상황이나 조건을 다 지울 때 얻을 수 있는 무엇입니다. 왜냐는 물음에 그 사람이라서 좋다는 대답 이외에는 도저히 다른 이유를 댈 수 없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원래 사랑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누군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고, 모든 게 다 사랑의 이유일 수 있다고. 맞습니다. 사랑에는 수만 개의 이유가 있죠. 무엇으로든 사랑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특이한 웃음소리가, 본인도 모르게 자주 쓰는 말투가, 작고 귀여운 손이, 민망할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 즐겨 입는 옷 스타일이, 춤을 추는 모습이, 내 얘기를 들을 때 짓는 표정이, 살짝 풍기는 비누 냄새도, 그 모든 게 이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시작하게 한 어떤 이유도 마지막까지 저 홀로 사랑을 지탱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의 시작점은 ‘어떤 것’일 수 있지만, 마지막에는 그 ‘어떤 것’도 내 사랑의 이유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집을 짓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처음엔 사소한 매력들로 벽돌을 쌓겠지만 결국 그 집을 가득 채우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끝까지 남는 사랑의 목적은, 정말이지 그 사람 자체뿐입니다. 그러니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날 왜 사랑해?” 이유를 만 개쯤 얘기할 수도 있지만, 결국 아무 이유도 대지 못합니다. 재촉한다면 해줄 말은 하나뿐입니다. “당신이라서.”

사랑, 나를 만나다
‘falling’ in love, 사랑에 ‘빠지다.’ 영어를 쓰든 한국어를 쓰든 사랑의 경험은 같은가 봅니다. 깊은 숲 속을 걷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웅덩이에 빠져 버리고만 상태, 사랑이란 그렇게 빠지고 떨어지고 추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한다”는 말은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 주지 못합니다. 사랑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게 옳습니다. “나 ,사랑에 빠.져.버. 리.고.야. 말았어!” 사랑은 상대방이라는 깊은 늪에 빠져 급기야 자신을 잃어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차라리 죽음 같은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사랑 안에서 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니까요.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이제 예전의 자신은 없습니다.
 
“눈이여, 끝으로 보아라! 팔이여, 끝으로 포옹하라! 그리고 입술이여, 오 너, 호흡의 관문이여, 올바른 키스로 다 삼키는 죽음과 무한 계약을 맺어라! (…) 난 이렇게 키스하며 죽는다.” _ <로미오와 줄리엣> 중 

그러니 로미오와 줄리엣이 상대방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살 이유가 더는 없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이미 자신을 상대방 속에서 잃어버린 후였으니까요. 마치 하나뿐인 보석을 보석 상자에 맡긴 것처럼.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으니 이제 자신을 찾을 길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보석 상자와 함께 보석도 사라진 것입니다. 사랑이 나를 훔쳤고, 이제는 죽어 버렸으니, 남은 나는 결국 아.무.것.도.아.닌.것.이 되어 버렸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죽은 순간 이미 함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부를까요? 그들은 상대방의 죽음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줄리엣의 죽음이 로미오를 죽이고, 로미오의 자살이 줄리엣을 죽이고. 그들은 상대방의 죽음이라는 살인 행위로 타살된 희생자들이며, 그들의 자살은 타살의 결과적 현상일 뿐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주어진 생의 길이를 거슬렀으나, 그 역행은 사랑의 본질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랑의 참된 본질은 자기 자신의 의식을 포기하여 자신을 다른 자기 속에서 망각하는 데 있으며, 이러한 소멸과 망각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를 소유하고 점유하는 데 있다.” _ 헤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곳에 있습니다. 철학자 헤겔은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초대하는 상실의 밤, 자신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하는 그 어둠의 끝자락에서 시작되는 회복의 아침을 말입니다. 사랑의 끝은 영원한 상실이 아닙니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자신을 잃어버리지만, 그 자기 상실은 역설적으로 본래의 ‘나’를 찾게 해줍니다. 바울은 헤겔보다 먼저 사랑의 본질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라디아서 2장 20절)” 바울은 사랑 안에서 죽었고, 그 안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예전의 나는 사라졌고 새로운 내가 나타났습니다. 진정한 사랑 안에는 죽음과 부활이, 존재의 변화가 늘 있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사랑 안에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문득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잭 니콜슨의 대사가 생각납니다.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한 고백이었죠.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요(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김영수|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50대에도 고전을 읽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50대와 함께 고전을 읽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학교가 아니라 삶을 위해 공부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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