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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3 01-02 이즌 쉬 러블리

이즌 쉬 러블리 5│소녀의 꿈을 이루며 오래 소녀로 살다 - 그림 그리고 글 쓰고 노래하는, 봄로야



소녀의 로망은 다채롭다. 약속 장소에 모여 일상을 나누며 모의한다. 모의를 통해 각자의 꿈은 날개를 달고 한 권의 책이, 하나의 노래가 된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소녀 시절을 떠올리면 우리는 대개 문학소녀였고, 연애와 성적에 대해 징징대던 그 사이 어디쯤에서 진중한 일기를 쓰고 있을 것이다. 다시 펼쳐보면 얼굴이 발개질 만큼 민망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때문에 우리는 ‘소녀’였다. 그 ‘소녀’의 시간을 통과하며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불가능하다는 말로 ‘먹고살기’ 위해 잠시 그 꿈을 접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소녀의 꿈은 노스텔지어가 되어 우리에게 짙은 향수를 불러내고 있지는 않은지. 봄로야는 그래서 더욱 부럽고 샘난다. 현실이라며 스스로 접어버린 소녀의 꿈을 보란 듯이 이루어가고 있어서다. 글 원유진 · 사진 최새롬

내 이야기를 담은 두 권의 책
“처음에는 표지만 바꾸려고 했어요. 책의 내용을 읽고 하나의 문장만 남겨서 그 문장을 표지에 적고 저만의 책으로 만드는 게 기획전 콘셉트였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악, 작가 대답하는 게 어렵잖아요.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뽑는 건 더 어렵더라고요. 제게 좋았던 문장을 하나만 꼽는다는 게.”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문장이었다. 문장을 남기고 나머지를 지우며 문장에서 생각나는 것을 그렸다. 캔버스인 책이 작으니 카페에서도 계속 그렸다. “할 때는 재미있었어요. 쾌감 같은 게 있어요. 반복적으로 지우 고 색칠하는 것.” 책에 낙서가 가득해지며 책을 통해 나를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걸 성장이라고 생각 안 했어요. 벗어나고 싶었고 새롭게 해보고 싶었는데, 결국은 성장에세이. 굉장히 개인적인 얘기가 들어간 독서기가 됐죠.” 
봄로야의 첫 책은 <선인장 크래커>다. “그림 소설인데 자전적인 게 앞에 붙어있어요. 제 안에 격정적인 마음을 쏟아냈거든요.” 20대 중반에 하는 고민. 특히 작가의 삶을 살고 싶다고 했을 때, ‘이해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며, 응원하면서 반대하는’ 모순을 견디기 어려웠던 그때의 감정과 여성으로서 확 내지르고 싶을 때에도 여러 이유로 쉽게 하지 못한 것을 깨달으며 쌓인 불만을 솔직하게 풀어냈다. “이래서 시집이나 가겠어?”, “나중에 할 얘기가 있겠어?” 등의 질문을 받을 만큼 거침없었다. 물론 자신의 고민이 모든 이를 대변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고통스럽다고 첫 책을 냈을 때도 부끄러웠어요. 제 이야기를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얘는 제대로 아파보지도 않고 진짜 가난이 힘든 걸 모르나’ 생각하시는 분도 있었죠. 소녀같이 보는 사람도 있었고요. 상대적이죠. 전, 부모 품에서 자아를 고민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차근차근 돌아가며 하나씩 
봄로야의 어렸을 때 꿈은 소설가,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 꿈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나 학부시절 ‘로야’라는 이름을 짓고, 일기를 쓰고 그림 그린 것을 웹에 올렸고, 책을 쓰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닫고 글과 그림을 넣어 책을 냈다. 음악은 특별했다. 첫 책을 내고 그 내용을 허밍으로라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방법을 찾을 때 우연히 뮤지션을 만난다. 이 만남은 작곡을 배우고 노래를 부르며 1집 <선인장 크래커>로 이어졌고, 숱한 기획전과 공연으로 뻗어 갔다. “봄로야라고 하면, 결과물이 어떻든 간에 어떻게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느냐를 제일 궁금해 해요. 돌이켜보면 돌아오는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 온 거죠. 하다 보니까 하게 된 거고, 해왔던 거니까 한 거죠.” 
이런 작업이 가능한 비결은 물었더니, ‘마감’이라고 했다. (아, 피 말리는 그 마감?!) “내 안에 마감을 줘야 해요. 그걸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 주변에도 저보다 그림도 잘 그리고 훌륭한 달란트를 지닌 사람이 있는데, 자기 안에 두려움도 있고, 완벽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안 나오기도 하거든요. 어쨌든 예술이란 것은 품에만 안고 있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소통하고 싶으면 보여야 하는 거거든요. 보이지 않으면 내 세계를 이해 받을 수 없는 거고. 일단 내가 이걸 이야기하겠다, 내보이겠다 결심을 하고, 그걸 왜 하는지 고민하는 거죠. 무엇을 어떻게 할 건지 계획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고, 언제까지 할 것인지도 정해야 해요. 그렇게 해놓으면 어쨌든, 하게 돼요,” 
봄로야에게도 작업이 항상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작업은 ‘누구도 찾아주지 않을 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게 한다.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어요. 아티스트를 만날 때마다 나더러 자유로워 보인다고 하는데 저는 그들이 자유롭고 깨어 있어 보여요.” 숱한 고민은 시간을 통해 조금씩 정리해 나간다. “나이를 먹으면서 좋은 건 뻔뻔해진다고 해야 할까요.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죠. 하고 싶고 닮고 싶다고 해도 안 되는 거니 그냥 내 스타일로 해야죠. 오히려 내 장점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해요.” 

“그냥, 그림 그리고 글 쓰고 노래하는 여자. 지금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그 세 개를 같은 비중을 두고 불살라가며 할 수는 없는 상황이거든요. 어쨌든 큐레이터로 출퇴근하고, 퇴근 후에 작업하는 거니까 적당히 현실을 버무려가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요.” 봄로야는 이렇게 현실에 발 닿기 위하여 소녀의 꿈을 포기하고도 그 끈을 놓지 못하는 우리에게 힘을 실어준다. 봄로야의 메일함을 가득 채운 ‘이것저것 다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와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대신하여 인사한다. 고마워요, 소녀로 살아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