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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한페이지 단편 소설

마지막 술잔

때늦은 신년회를 마치고 근처 사우나에 갔다. 술을 마시면 집에 가기 전에 사우나에 들르는 버릇이 있다. 김팀장에서 김과장(님)으로 승진한 녀석이 폭탄주를 연거푸 권하는 바람에 인사불성이 되었다. 입사 동기가 먼저 승진을 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온탕에 멍하게 앉아 있다 깜빡 졸 뻔했다. 잠이 쏟아졌다. 욕실을 나와 수면실로 직행, 착한 아이처럼 잠이 들었다. 썰렁한 기운 때문에 잠이 깨었을 때, 시간은 정확히 새벽 두 시.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동네가 어디쯤이었지? 서둘러 로커로 달려갔다. 86번 열쇠가 발목에 달려 있었다. 그걸 로커에 꽂으려고 했을 때, 바로 옆에 있는 84번 로커에 열쇠가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건망증이 심해 열쇠를 두고 나갔겠지.’ 
주변을 둘러봐도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 속엔 언뜻 봐도 검은색 고급 순모 코트가 백화점에서 막 나온 것처럼 걸려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부들부들한 실크 셔츠, 주름이 하나도 없는 정장과 코트를 걸쳐 입었다. 넥타이도 검었다. 거울에 비춰보니 마치 내 옷처럼 딱 맞았다. 신발도 반짝반짝 광이 나는 가죽 구두였다. 상표를 슬쩍 봤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나는 후다닥 밖으로 나와 버렸다.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차가운 날씨였지만 외투 때문에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별로 없지만 어쩐지 다들 나를 흘깃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러움의 시선들이겠지.
눈앞에 어딘지 낯익은 바가 보였다. 이름은‘ 라스트 샷Last Shot’. 부스로 된 테이블에 중년 남녀 한 쌍이 앉아 있었다. 나는 텅 빈 바에 자리를 잡았다. 짙은 적색 조끼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바텐더가 다가와 눈으로 인사를 했다. 
맥주를 달라고 말하려는데, “늘 드시던 걸로 하시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도 1분쯤 뒤에 바에는 붉은 빛깔의 칵테일이 나왔다. 감기약 같은 단맛이 나다가 식도부터 위까지 열기가 점차 퍼졌다. 사래가 걸려 기침을 몇 번 했다.
“저를 아세요?”
반쯤 칵테일을 비우고 바텐더에게 물었다.
“그럼요, 단골손님이시니까요. 요즘엔 통 보이지 않으셔서 출장이라도 간 줄 알았습니다.”
나는 잔을 비웠다. 그는 나를 다른 누군가로 착각하고 있다. 설마 이 옷의 주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얼굴을 닮은 누군가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뭔가를 더 물어보려고 했는데 바에 남자 손님 두 명이 앉아 버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을 꺼냈을 때, “오늘은 서비스입니다. 먼 길, 살펴 가십시오” 라고 바텐더가 말했다. 나는 고맙다는 미소를 짓고는 어색하게 밖으로 나왔다.
안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꺼냈다. 검은 가죽의 그 지갑에는 신분증과 서너 개의 신용카드, 그리고 만 원짜리 대여섯 장이 들어있었다. 신분증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내 얼굴도 아니고, 내 이름도 아니다. 그 때 휴대폰이 울렸다. 벨소리는 내 것과 똑같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이, 송팀장. 어디야? 로커를 열어놓고 어디 갔어?”
김과장이 아랫사람 부리듯 짜증을 낸다. 술이 아직 덜 깬 듯하다.
“넌 어디냐?”
“사우나지. 젠장, 그런데 여기가 어느 동네인지 잘 모르겠네. 로커 열쇠도 잃어버렸다고. 손님도 하나 없고, 주인도 없나봐.”
지갑의 신분증엔 김문수, 전화를 건 김과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로커에서 몰래 입은 옷은 그가 입고 있었던 옷이 아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기억이 슬슬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다 보내고 허름한 주점에서 김과장과 나는 술을 마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가에서 김과장과 시비가 붙었다. 주먹다짐이 이어졌고, 길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마지막 기억은 굉장히 추웠다는 것뿐이다. 얼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추웠다.


서진|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일명, 한단설 1pagestory.com)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 헤매는 북원더러(Book Wanderer),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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