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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살림의 나날

마당을 나온 아줌마

언제부터였을까. 내 꿈은 작가였다. 그 꿈은 건축에 반해 이과를 지원했을 때도, 건축과가 수학과 전쟁하는 것임을 누군가에게 듣고는 차선으로 택한 의류학과를 다니면서도 유효했다. 
가난했던 대학생활에 점을 찍고 취업을 했다. 내가 누구인지 똑띠(똑똑히)보여주겠다는 야심으로 디자이너를 시작했지만 곳곳에서 만나는 처절한 인생들(지하철 내 상인과 앵벌이) 때문에 내 일에 회의가 밀려왔다. 세상에 요지경인데 부자들 입히자고 옷 만드나 싶어 죄책감이 밀려왔다(으이그 이원론자!). 묻어두었던 글에 대한 열망은 이 일을 조롱했고 새벽별 보기에 지친 심신은 이 일에서 빠져나오길 종용했다.

그렇게 4년을 버티고야 나는 우여곡절 끝에 출판사 편집자가 되었다. 일 자체가 외적 지향에서 내적지향으로 바뀌자 비로소 평안이 찾아왔다. 삶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외적 지향적인 일에서 내적 지향적인 일로 옮긴 사실만으로도 나는 조금 더 옳은 삶을 사는 것만 같았다. 
편집자가 된 이후로 나는 더욱 내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 되었다. 매월 엄청난 양의 책을 사들였고 책모임에서 지금의 남편을 알았다. 데이트도 갖가지 세미나를 들으며 했고 태교도 촛불시위로 했다. 나는, 우리 부부는 철저하게 내적 가치를 지향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내 신들메도 풀지 못할 나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 건 둘째를 낳은 후였다. 별나도 너무 별난 둘째 때문에 폭삭 늙었다. 하지만 나는 내적 가치를 지향하는 지식인이므로 거울을 잘 보지 않아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고, 친구들은 십년 만에 만나도 “너 그대로다! 깔깔깔”하는 법인지라 나의 노화에 관대했다. 그런데 문화센터에서 새롭게 안 40대 중반의 주책맞은 아줌마에게 “어머! 나보다 나이 많은 줄 알았어 호호호!” 하고 돌직구를 맞고, 5살 어린 동네 동생과 들어간 옷가게에서 주인이 “따님인가봐요!” 하는 주책 풍년을 떠는 몇 번의 경우를 당하고 나니 극심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몇 년을 버티다 피부과에 제 발로 찾아 갔으나 비싸서 좌절. “될대로 돼라 마! 이놈의 세상!”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화장도 안 하고 세수도 안 했다. 물론 피부는 나날이 늙어갔을 터. 그러다 우연히 모 수입 방문 판매 화장품을 접했다. 첫느낌이 좋았다. “이거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1년을 정성스레 쓰고 나서 드디어 나는 내 나이에 적절한 피부로 돌아왔다(응?).
솔직히 피부 때문에 좌절하는 나를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겨우 이 따위에 내 맘이 무너지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화장품을 쓰기 시작하며 책이나 내적 가치가 아닌 화장품에 돈을 들이는 게 이상하게 켕겼고 죄책감마저 들었다. 

출판사에서 일한 덕분에 정말 좋은 저자, 지식인을 덤으로 만나는 복을 누렸다. 그 속에 있는 것만으
로도 내가 지식인인 듯했다. 최근에는 트윗과 페북을 통해 내가 감히 얼굴조차 대면하기 힘들었던 이들과 친구를 맺고 대화를 하면서 나는 더욱 그런 듯했다. 하지만 툭 까놓고 보면 나는 피부의 노화에 일희일비하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였고 아줌마였다.
1년여의 고민 끝에 나는 내가 쓰던 화장품 회사의 뷰티컨설턴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오갔지만 마지막까지 내가 놓지 못했던 건‘ 지식인’이라는 타이틀이었다. 지금처럼 글을 쓰고 책을 기획하면 내가 아는 수많은 진보 지식인과 교수, 목사와 동급인 것 같은데 화장품 뷰티컨설턴트가 되는 순간 나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스스로 설정한 신분에서 하강하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저 화장품 판매원을 선택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새해다.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을 한다. 낯설고 서툴고 부끄럽다. 하지만 
이 일이 내게는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라고 생각하기에 내심 기대를 품고 있다. 당신도 그랬음 좋겠다. 누군가의 눈 때문에, 혹은 내가 만들어 놓은 나 자신의 한계 때문에 자신을 가두어 두었다면 마당을 나온 암탉처럼 비상하는 한 해 만들어보기를.


이경희|필명 조각목, 소싯적 옷 만들고 책 만들
다 결혼 후 마님으로 살면서 음지에서 야매상담가로 맹활약 중. 바느질에 관심을 쏟다가 목 디스크 때문에 그만두고 페이스북 에서 수다 떨듯 글을 쓰다가 최근 작가와 출판전문기획자를 동시에 해보기로 결심함. 여성의전화 소식지 기획위원, 지역신문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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