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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인디 : 구름에 달 가듯이 산다

세계의 끝, 꼬마친구|<비스트(Beasts of the Southern Wild)>Benh Zeitlin, 2012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 프랑수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 목록이다. 벤 제틀린의 첫 장편 영화 <비스트>를 두고 이들에 맞먹을 영화사적 걸작이라고 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벤 제틀린은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이제 막 첫 장편을 완성한 신인감독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영예를 독점했다. 이 영화가 작년 한 해의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비스트>의 배경은 세계지도의 맨 아래, ‘욕조’라는 이름의 섬이다. 욕조 섬은 세상 어느 곳보다 축제일이 많은 땅으로, 아이들은 자연이 내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꼬마 허쉬파피는 아빠 윙크와 함께 살고 있다. 엄마는 지금 곁에 없지만, 아빠의 추억담 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꼬마는 짐승(beasts)처럼 살아가는 섬사람들과 함께, 자연이 뿜어내는 야생의 기운을 양분으로 매일매일 단단하게 여물어 간다. 근심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섬사람들에게도 세 가지 공포가 있다. 첫째는, 남극의 빙하가 녹으면 세계 최남단의 욕조 섬은 통째로 물 밑으로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둘째는, 빙하가 깨짐과 동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포악한 짐승 오록스가 깨어날 거란 전설. 셋째는, 뜻밖에도 제방 북쪽 사람들의 존재다. 그들은 빙하가 녹아 육지로 물이 넘어오는 일을 막기 위해 욕조 섬과 그들을 가르는 제방을 쌓았다. 그들의 눈에 남쪽 사람들 보호소로 잡아들여 ‘문명화’해야 할 대상이다. 욕조 섬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실질적이고 불쾌한 위협이다. 영화는 마을 사람이 어떻게 위기에 맞서고 삶을 지탱해 나가는지, 그 과정에서 아이는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욕조 섬’은 가상의 세계지만, 묘하게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다. 이는 전적으로 허쉬파피 역을 맡은 쿠벤자네 왈리스의 연기에 빚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스트> 제작진은 1년 동안 어린이 4천 명의 8천 개 눈동자 속에서 야생의 순수함을 간직한 단 두 개의 눈동자를 찾아냈다. 그녀는 촬영 당시 5세의 나이로 아카데미 역사상 최연소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경합을 벌이는 후보들이 <더 임파서블>의 나오미 왓츠, <아무르>의 엠마누엘 리바 등이니, 수상 여부를 떠나 이만큼이나 빛나는 재능이 이토록 작고 천진한 아이에게서 발견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연기 신동의 놀라운 연기 외에도 영화는 다채롭고 풍성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빙하가 녹는 장면, 오록스가 무리지어 달리는 장면은 미니어처만으로 만들어낸 황홀경이다. 적은 제작비로는 CG를 감당할 수 없어 고안해 낸 자구책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물론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욕조 섬의 동화적인 스펙터클은 원시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을 근거로 야생의 생활을 신 화화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쪽 동네’를 악으로, ‘우리 동네’를 선으로 가르는 단순한 이분법에 반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 희생을 자처하는 부성애 등 감정을 건드리는 지점은 다소 상투적이다. 이미지만으로 충분한 순간에도, 허쉬파피의 내레이션이 장광설을 늘어놓아 감흥에 반감을 주기도 한다.

마냥 상찬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닐지라도, <비스트>는 결말부에 이르러 모든 결점을 덮어두고 싶을 만큼 마음을 허물어뜨리는 힘이 있다. 이는 쉽게 잊히지 않을 감흥이다. 슬픔의 거대한 덩치가 오록스처럼 우리를 압도할 때, 발밑에서 세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진동이 느껴질 때. 힘 있는 자들이 자기 본위대로 세계를 이해하고 재편하려 할 때, 이에 맞선 모든 저항이 헛발질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언젠가 욕조 섬에 불시착한 미래의 과학자처럼, 허쉬파피가 남겨둔 용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용기의 일부를 우리 안에서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김다영|독학자. 부산독립영화협회 회원. 윌로씨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