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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고전으로 오늘을 읽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지혜 없음의 지혜



“이 고발장과 진술서는 알로페케 구의 소프로니코스의 
아들인 소크라테스를 상대로, 피토스 구에 사는 멜레토스의 아들인 멜레토스가 작성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이 믿는 신들을 믿지 않은 죄, 그리고 새로운 신들을 들여와서 퍼뜨린 죄를 범하고 있다. 그는 또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를 범하고 있다. 형벌로서는 사형을 제안한다.”(<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에서 재인용)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다
고소장이 낭독되고 재판을 시작합니다. 피고인인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아테네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판결이 잇따릅니다. 유죄 281표, 무죄 220표. 근소한 차이지만 아테네 시민은 소크라테스가 위험한 인물(혹은 위험할 정도로 이상한 인물)이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형벌을 정하는 재판이 남았으니까요. 소크라테스에게 변론의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집니다. 유죄와 무죄의 표차가 크지 않았습니다. 배심원 앞에서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고 용서를 구한다면 벌금형이나 해외추방형으로 마무리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오히려 배심원의 화를 돋웁니다. 대중의 비위를 맞출 생각이란 애당초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마도 여러분은, 제가 이 
소송에서 무죄 방면이 될 수 있도록 온갖 짓거리와 온갖 말을 다해야만 된다는 생각은 했지만, 여러분을 설득할 수도 있었을 말이 부족해서 유죄 판결을 받게 된 것으로 저를 생각하시겠죠.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쨌든 부족해서 제가 유죄 판결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그러나 실은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뻔뻔스러움과 몰염치가 부족해서며, 또한 여러분이 듣기에 가장 기분 좋을 그런 것들을 여러분한테 말하고 싶어 하는 열의가 부족해서입니다. 제가 통곡을 하며 탄식한다든가 또는 그밖의 것들로서, 제가 말하듯, 저답지도 않은 여러 가지 짓거리와 말을 하고자 하는 열의가 부족해서입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여러분께서 다른 사람들한테서 듣는 데 익숙해져 있기도 한 것들이죠. 그러나 저는 그때에도 위험 때문에 자유인답지 못한 어떤 짓도 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도 그렇게 변론한 것을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렇게 하고서 사느니보다는 이런 식으로 변론하고서 죽는 쪽을 택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중에서)

죽음을 자처한 셈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결과는 361 대 140으로 사형 확정.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과 함께 서양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재판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과 함께 ‘철학’의 역사는 시작합니다. ‘철학’으로 변역된 필로소피(philosophy)는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왔습니다. ‘필로’와 ‘소피아’는 각각 ‘사랑하다’와 ‘지혜’라는 뜻입니다. 지혜를 사랑함. 철학의 본뜻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고서 사느니 보다는 이런 식으로 변론하고서 죽는 쪽을 택합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대중에게 아첨을 떠느니 진리를 고수하고 죽음을 택하겠다는 선언, 지혜를 사랑하되 목숨보다 더 사랑하겠다는 다짐, 철학의 정신은 이렇게 소크라테스라는 개인의 결단과 죽음에서 육신을 얻었습니다. 


무지함을 받아들이어 지(知)에 이르다
재미있는 건 소크
라테스가 스스로 자신을 무지한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지혜를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던 그 사람이 말입니다. 그의 죽음과도 연관된 것이니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젠가 소크라테스의 친구 한 사람이 아폴론 신전에 가서 신탁을 받았습니다.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 이 말을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신탁이 틀렸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그는 신탁의 내용을 시험해보기로 합니다. 현명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가 질문을 던지기로 한 것이죠. 질문에 척척 대답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전에 찾아가 “신탁의 응답에 대해 ‘여기 이 사람이 저보다 더 현명한데도, 당신께선 제가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대거리를 할 요량이었죠. 하지만 이 당돌한 시도는 곧 실패합니다. 누구도 그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박식하다고 뽐내던 이들이 그의 질문 몇 마디에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제야 신탁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가 현명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마음 속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 이 사소한 한 가지 것으로 해서, 즉,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이 사실로해서, 내가 더 현명한 것 같아’라고 말씀입니다.”(<소크라테스의 변론> 중에서)

이제 이 깨우친 자는 아테네 인에게‘ 무지(無知)의 지(知)’, ‘지혜 없음의 지혜’를 전파하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의 무식함을 들추고 다녔다는 말입니다. ‘넌 참 무식한 사람이야’ 이런 말을 들은 그 누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고깝게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점점 그의 적은 늘어갔습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으라고 말하고 다닌 그 수십 년 간, 소크라테스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왜 용서를 구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아테네 시민 앞에서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을 진정한 진리로 이끌고자 했던 수십 년의 시간을 부정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지를 깨달으라던 자신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합니다. 그는 지혜를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진리로 나아가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장 32절) 이 말을 조금 비틀어 읽어볼까요. 진리를 얻기 위해 우린 우선 자유로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익숙한 믿음, 명백한 확신에서 벗어날 준비를요. 어제의 믿음을 고수하는 한, 내가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함을 깨닫고 ‘지금껏’ 진리라고 확신해오던 것들을 의심하지 않는 한, 우린 진리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지금껏 철석같이 믿었던 그 진리를, 그것을 의심한다면 친구들이 여러분에게 등을 돌릴지 모르는 것들을, 여러분이 소속된 집단이 진리라고 설파하고 있는 그것을 의심할 때, 우린 비로소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 것인지 모릅니다.

한편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진리란 다수결이 아님도 알게 합니다. 언제나 소수가 옳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차라리 진리란 숫자와 관련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수’라는 안락함과 안전함에 파묻혀 있을 때, 우린 진리와 얼마나 가까울까요. 지혜를 사랑하는 건 퍽 용감한 일입니다. 무리 밖으로 나가 홀로 어두운 광야에 설 각오를 해야 하니까요. 물론 밝은 빛을 떠나 어두운 회의의 광야로 나가는 일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상상해보세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다시 만날 빛을. 그 빛이 어찌 이전과 같겠습니까. 그러니 진리를 구하는 이는 소수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믿음을 회의하고 새로운 진리를 찾은 용감했던 소수, 우리가 신약성서에서 만나볼 수 있는 그들처럼 말입니다.


김영수|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50대에도 고전을 읽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50대와 함께 고전을 읽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학교가 아니라 삶을 위해 공부한다”는 말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