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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한페이지 단편 소설

우주의 쓰레기는 어디로 사라질까?

예배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습관처럼 ‘행복한 나라’에 들렀다. 행복한 나라는 우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중고 물품점으로 성도들이 기증한 물건을 저렴하게 판매한다. 수익금은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해 쓰인다.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여성 의류고, 가장 인기 없는 품목은 중고 책이다. 나는 주로 전기 기구 쪽을 살펴보는데 가습기와 녹즙기가 주를 이룬다. 때로는 비디오 플레이어나 대형 오디오가 등장하기도 한다.
“앗, 쓰레기 건조기다!”
아내가 소리쳤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 때문에 골치를 앓던 아내는 친구 아파트에 가니 빌트인으로 쓰레기 건조기가 있었다고 부러워한 적이 있다. 우리는 누가 가로채갈까 싶어 부랴부랴 건조기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흠집도 전혀 없어 신제품 같았다. 외관은 매끈한 아이보리색의 전자렌지 모양이었고, 문짝 한 가운데 주황색 형광빛 원을 파 놓았다. 버튼은 단 두 개. 전원 버튼과 화살표 버튼 밖에 없었다. 플러그를 꽂고 전원 버튼을 누르니 주황색 원에 은은하게 불빛이 들어왔다. 아내는 시험 삼아 참외 껍질을 넣고 화살표 버튼을 눌렀다. 우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주황색 불빛이 점점 강해졌다. 
“시간이 좀 걸려. 친구 집에서 해 봤거든. 정말 감쪽같이 음식물이 말라비틀어진다고. 이야, 이걸 만 원에 구입하다니 운이 좋다.”
허름한 빌라에 전세로 사는 것도 미안한데, 중고 쓰레기 건조기로 기뻐하는 아내를 보니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내는 마트에 가고 나는 부엌에 앉아 책을 읽었다. 행복한 나라에서 천 원을 주고 산 <15소년 표류기>다. 졸음이 슬슬 오기 시작했다. 소년들이 표류하는 곳이 바다가 아니라 우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땡, 하는 벨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건조기의 주황색 불빛이 꺼졌다. 건조를 종료했나 보다. 문을 열어보았다. 어라! 플라스틱 그릇에 담겨 있어야 할 참외 껍질의 흔적이 없다. 수분이 증발해서 말라비틀어진 껍질이 있어야 하는데 사라져 버렸다. 잠든 사이 아내가 꺼내갔나 싶었지만 아직 마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의 마트 쇼핑은 두세 시간이 기본이다. 이번엔 감자 한 알과 양파 하나를 집어넣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화살표를 여러 번 눌렀다. 우우웅 하는 소리가 이전보다 커진 것 같았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땡, 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어 보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참외 껍질과 감자, 양파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혹시 이 기계는 원자 단위로 물질을 쪼개서 공기 중으로 배출하는 건가? AS센터 전화번호라도 적혀 있으면 물어볼 텐데 뒤쪽에 붙어 있어야 할 제품 정보가 없다. 아내는 기뻐할지도 모른다. 음식물 쓰레기 자체가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하다. 뒤쪽을 살펴보다가 작은 스위치를 발견했다. 깨알같이 작은 영어로 ‘mode’ 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은 오른쪽에 있는 것을 왼쪽으로 돌려보았다.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정상 모드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더 이상한 모드일지도.
모드를 바꾸니 주황색 원이 파란 색 불빛으로 바뀌었다. 오호, 제법 신경을 쓴 제품인데? 이번엔 뭘 넣어 볼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읽고 있던 책이 보였다. <15소년 표류기>를 건조기에 집어넣고 화살표 버튼을 눌렀다. 혹시 불이 나면 어쩌나, 걱정을 잠시 했지만 여차하면 스위치를 뽑고 물을 뿌리면 되겠지.
화살표 버튼을 눌렀다. 이번엔 5분 만에 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피가 좀 작았나?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문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수상한 냄새가 안쪽에서 나는 것 같다. 한 여름 오후에 썩어가는 음식물 냄새, 아니 그것보다 더 지독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쓰레기 냄새가 문틈으로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보!”
아내가 소리쳤다. 나는 식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책은 반쯤 펼쳐져 있다. 침 때문에 책이 젖어 버렸다. 자고 있었나? 아내는 쓰레기 건조기 문을 열려고 한다. 
“잠깐만, 열지 마!”
내가 소리쳤지만 아내는 들은 척도 안하고 문을 열어보았다.
“어어, 이상하다?”
아내가 플라스틱 통에서 뭔가를 끄집어낸다.
“참외 껍질이 그대로야. 무겁게 여기까지 들고 왔는데…, 반환해야겠네. 아, 속상해.”
아내는 쓰레기 건조기의 전원을 뽑아 버렸다. 나는 한참이고 파리가 꼬이는 참외 껍데기를 들여다보았다. 문득 우주의 쓰레기는 어디로 사라지는지 궁금해졌다.


서진|소설가.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하트브레이크 호텔> 한 페이지 단편소설(1pagestory.com)을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읽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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