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모종밭에 김매기를 한다. 40미터짜리 다섯 이랑 중에 하우스 양쪽, 즉 냉기가 침입하는 부위에서는 고구마 싹이 거의 나오지 않고 풀만 자라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생각했다. ‘풀과 고구마 순이 함께 자란 이랑은 호미로 매고 나머지 두 이랑은 천연 제초제인 식초를 뿌려야겠다!’ 처음부터 아예 두 이랑은 제쳐두고 호미질을 했다. 아내와 함께 보조를 맞추어 달팽이처럼 엉덩이 끌고 지나간 자국을 남기며 기어나갔다. 한 이랑을 지나는 데 2시간씩이나 걸렸다. 그리고 고구마 순은 없고 풀만 자라있던 나머지 두 이랑은 가장 뜨거운 시간에 하우스 문을 닫아 놓고 식초를 뿌렸다. 제발 잡초들이 전멸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경제성과 효율성 앞에서
며칠 후에 가서 보니 기대한 대로 어린 풀은 붉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쭈그려 앉아서 해야 할 일이 줄어든 것에 기뻐하며 생존한 풀을 호미로 긁어 나갔다. 4시간 걸려서 해야 하는 작업이 겨우 40분 만에 끝났다. 작물과 땅에 해를 입히지 않고서도 일을 빨리 마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방법인가! 그러나 이내 불편한 마음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식초를 뿌리는 그 마음, 즉 노동의 효율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싶은 것은 정확하게 제초제를 뿌리는 범(凡)농부의 심리와 일치하는 것이다. 제초제와 살충제 뿌리는 사람의 마음이 특별히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힘 좀 덜 들이 고 농사지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 안 치고 농사지어 봐야 제 값 받고 팔 수 있는 길을 찾기도 묘연한데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기도 싫어서다. 식초와 제초제가 땅과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두 행동은 결국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오늘의 현실에서 나 자신이 농사를 지으면서 효율성과 경제성의 원리에서 얼마만큼 거리를 두고 수행으로서 농사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인지는 자신 할 수 없으나 그 문제의식만큼은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간직하였다. 부디 아이들 얼른 자라서 풀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과수원 농사만 지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제 막둥이가 세 살이니 그날이 언제 오려나!



경건하게 땅위에서
고구마 심는 날이다. 내일 비 온다는 예보를 접하고 며칠 전부터 아내가 잘라놓은 고구마 순을 차에 싣고 할머니들과 함께 밭으로 향했다. 할머니들은 대부분 70대를 훌쩍 넘기신 노인이다. 나와 품앗이 친구인 분이 대부분인데 자식들은 도시로 나가고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혼자 사는 분이 많다. 나는 할머니들 밭을 갈아주거나 산소 벌초 그리고 농산물 운반 등을 해드리고, 할머니들은 우리집 고구마를 심거나 수확할 때 도와주신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들은 그간 있었던 일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신명나게 고구마를 심는다. 어쩌면 저리도 신 나게 일을 하시는지 그 기운이 내 마음도 밝혀준다. 
새벽부터 시작한 고구마 심기를 늦은 오후까지 계속했다. 내일 비 온다는 예보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때를 맞추어 먹구름은 몰려오고 냇가를 거쳐 온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나는 다음 밭에 고구마 순을 가져다 놓기 위해서 할머니들에 앞서 상자를 들고 윗밭으로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상자를 내려놓고 아랫밭에서 일하고 계신 할머니들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들은 고구마를 심느라 하나 같이 허리를 굽혀 땅에 절을 하고 계셨다. 고구마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고이 접어 신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진정 인류의 삶을 지탱하는 일보삼배의 제사장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이 경건한 모습 앞에 눈물이 핑 돌지 않을 사람 누가 있으랴! 


일을 마치고 할머니들과 막걸리 한 잔 나누어 마시며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얼굴은 햇빛에 검게 그을려 기름기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으며 나이테 마냥 깊은 주름이 살아온 길을 대변하고 있다. 등뼈가 다 드러나도록 가녀린 몸매에 허리는 좌우로 심하게 뒤틀려 있다. 막걸리 잔을 쥐고 계신 손 마디마디는 굴곡이 심하고 손톱과 지문은 땅에 닳고 닳았다. 마음이 시리도록 자연을 닮아 있다. 그러나 고목을 뚫고 새어 나오는 음성과 마음 빛은 실로 내 스승임을 깨우쳐준다. 평생토록 땅을 섬겨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바로 나의 곁에 있구나!


최혁봉|벌교 산골살이 여덟 번째 겨울을 살아내고 있는 농부. 자연을 맨살로 대하는 농사야말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온전한 인간이 되는 좋은 길이며, 사회적으로도 다시 되돌아가야 할 삶의 형태라 여겨 자연에서 기도와 노동을 실천하고 있다(주로 참다래와 호박고구마 등을 농사지으며 살림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salimfarm.com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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