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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3 09-10 가을밤, 물들다

가을밤, 물들다 1│깊어가는 가을밤의 노크

제 딸이 22살 때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아빠는 네 ‘남친’ 이 나이 많고 자식 딸린 이혼남이든, 피부색이 다르든, 교회를 다니지 않든 그런 것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널 믿고 결혼을 승낙하겠다.” 물론 저도 딸이 나이 많고 애 딸린 이혼남이나 타종교인과 결혼 승낙을 받겠다고 집에 오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제 딸의 인생을 주관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 없다면, 실패를 두려워 말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아이를 믿어주며 격려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 확신했던 것입니다. 
올해로 28살이 된 딸아이는 몇 년 전부터 교회 청년부에 나가지 않습니다. 대학 때까지는 꼬박꼬박 잘 나갔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교회로 옮기고 처음 한두 번 참석해 보더니 안 가겠다고 하더군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러라고 했습니다. 교회라면 모를까, 청년부에는 좀 안 나가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존 청년부에 속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삶과 신앙과 역사에 대해 더 바른 시각을 세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20여 년 전 일입니다. 신림동에 있는 왕성교회 청년부 담당 교역자였던 저는 어느 해 청년부 총회를 앞두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총회에선 여성 회장의 당선을 보고 싶다!” 당시에도 남자 청년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개척교회에서는 중고등부나 청년부 여자 회장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 대다수 교회에서 여자는 아무리 신앙 좋고 똑똑해도 부회장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회장은 남자만 해야 한다는 성경과 무관한 상식에 안주하는 한국 교회의 청년부를 흔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3주간에 걸쳐 여자도 회장이 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연속 설교를 하였지요.
1세기에 이미 바울은 로마서를 들고 갈 대표로 겐그레아 출신의 뵈뵈라는 여성을 보내면서 로마 교회가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로마서 16장 2절) 주라고 한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여성을 교회 지도자 또는 중요한 일꾼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뵈뵈는 청년부 회장 정도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공식 대표로 로마를 방문했는데 왜 너희 자매들은 아직도 부회장으로 만족하느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여성이 회장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은 회칙 어디에도 없는데 말입니다. 당시 100명이 훨씬 넘는 자매가 있었지만 여성을 회장은커녕 후보로조차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자가 청년부 회장이 될 수 없다는 가부장적 전통을 성경의 눈으로 새롭게 읽어내지 못한 것은 한국 교회 대다수 청년부가 극심한 남소여대(男小女大)현상 앞에서 초토가 되다시피 한 것에 비하면 양반입니다. 믿음 좋다는 자매들도 ‘노처녀’ 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과 가족·친지들의 간섭 앞에서 절망하긴 매한가지였습니다. 신구약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남자보다 여자 나이가 많은 것을 금한 법이 없지만 청년 교역자들이나 교회는 연상 자매와 연하남의 연애에 대해 유교적 잣대를 들이대며 훼방꾼 노릇을 하였습니다. 제가 청년부 교역자로 있을 때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교회에서는 연하남과 연애를 하려면 적지 않은 감정적 소모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혼녀나 이혼남을 금기시하는 그 어떤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한국교회와 크리스천 가정에선 이 문제가 난공불락입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청년부 현실이라는 제 진단이 틀리지 않다면, “어떤 문화를 즐기며 가을밤을 보낼 것
인가”가 우리의 일차적 관심이어선 곤란하지 싶습니다. 매주 리더 모임에 참석하느라 시집을 못 갔기 때문에 다른 문화적 이벤트나 행사에 눈을 돌리는 것으로 청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토요일에 리더모임에 참석하느냐 다른 문화적 행사에 참석하느냐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청년부를 떠나느냐 남느냐?’ 도 근본적인 대안은 아닌 듯합니다. 바이블 스터디를 열심히 하면 뭣합니까. 성경의 눈으로 연애와 결혼에 관한 한국교회의 가부장적, 차별적, 유교적 전통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 교회 내의 차별을 조장하고 상처 주기에 급급한데! 그런 이유로 2013년의 가을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로 두리번거릴 것이 아니라 먼저 편견을 배제한 채 성경을 읽는 가운데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할 것입니다.


지강유철|지휘를 전공하고 20여 년간 청년 교역자로 일했다. 1998년 교단장 금권선거 양심선언 이후 기윤실과 개혁연대에서 사무국장을 지냈다. 사람이 좋아 우리 시대의 아웃사이더들을 집중 인터뷰하였다. 지은 책으로 <요셉의 회상> <안티 혹은 마이너> <장기려, 그 사람> 등이 있으며 현재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과 <뉴스엔조이> 편집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