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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문화동네 사람들

불안을 떨치고 한걸음씩 내딛다│ 배우 조은지



실제 제 모습과는 상관없이 남에게 보이는 성격(외적 인격)을 우리는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이는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가 썼던 가면을 부르던 말에서 왔다. 실제 가면을 쓰고 관객을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배우는 작품마다 배역에 맞는 가면을 쓴다. 우리는 자주 가면과 배우의 맨얼굴을 혼동한다. 영화 <눈물>(2000), <아프리카>(2002),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 <후궁>(2012), <런닝맨>(2013) 등에서 선이 굵은 캐릭터를 유감없이 소화하며 신스틸러로 제 자리를 두텁게 돋우는 배우의 스크린 밖 모습은 상당히 달랐다. 조심스럽고 겸손하면서도 솔직하고 강단 있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배우 조은지는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나누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글 원유진·사진 탁영한



배우로 살아낸다는 것
8월 말 촬영에 들어갈 영화 <포인트 블랭크>는 납치당한 아내를 구하고자 남편과 남편이 돕던 킬러가 힘을 합쳐 범인을 쫓는 액션영화로 크게 흥행한 동명의 프랑스영화(2010)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조은지는 범인을 쫓는 형사 역할을 맡았다. 큰 액션신은 없지만, 강력계 형사로 액션이 몸에 밴 모습을 보이고자 액션스쿨을 다니며 부지런히 몸을 만들고 있다. “배우들이 쉴 때 뭘 배워둔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다음 작품을 정하고, 그에 맞는 걸 준비하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오디션을 보거나 의뢰를 받아 작품을 결정하고 계약을 한다. 몇 달에 걸쳐 촬영을 하고 후보정 작업을 거쳐 홍보와 개봉 무대인사를 다니다 보면 한 작품이 마무리된다. 이렇듯 배우의 일은 ‘단기계약직’이다. 어디에 매이지 않았기에 자유롭기도 하지만, 그만큼 불안한 삶이다. 바로 다음 작품을 정해 놓더라도 그 후의 일정까지 계획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정규직, 계약직의 신분이 지니는 불안은 조은지의 등을 떠민다. 훌쩍 떠나는 여행이 잦은 이유다. 혼자서 떠나기도 하고, 동행이 붙기도 한다. ‘오늘 뭐하니?’하고 연락하는 지인에게 “여행할 테니 같이 가겠느냐”고 물으면 된다. “크게 뭘 하진 않아요. 돌아다닐 때도 있고, 한적한 곳에 가서 책을 읽거나 TV를 보고 그래요.”
추천할 만한 곳을 부탁하니, 전주한옥마을을 이야기해준다. 비수기에 가면 관광객이 많지 않아 한옥이 주는 고즈넉한 기운을 더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다고 했다. 한옥마을 안에 있는 카페에 가기도 여러 번이라 카페 주인 모녀가 알아보기도 한다고. 가만히 몇 시간이고 앉아서 읽거나 쓰고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머리에 부유하는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와 다시 다음 작품을 고르고, 배역에 맞게 준비하고 작품에 들어간다. 다시 새로운 도전이다. 차근차근 하나씩 작품을 해 온 것이 벌써 13년이나 되었다. “사람들이 말해줘서 알아요. 제가 13년 차라는 거요. 저는 늘 처음 연기를 시작하던 그때와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다듬어 가는 손길을 느끼며 사는 삶
지금도 누군가는 ‘배우가 되는 것’을 꿈꾼다. 조은지에게 ‘배우가 되는 꿈’은 이뤄진 지 오래다. 이룬 꿈은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 다시 새로운 꿈을 꾸게 돕는다, “매 작품마다 꿈을 이루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좋아요. 꿈 하나를 이루고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새 작품을 하며 또 하나의 꿈을 이루는 거죠.”
연차를 쌓아올려 경력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불안을 떨치고 내딛는 한 걸음에 가까운 것이 배우의 삶이기에 걸어온 길을 돌아볼 여유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살아온 시간을 복기해 보면, 찬찬히 걸어온 자국이 오롯하게 남아 만들어 놓은 길이 보인다.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인도해 오셨구나, 생각해요. 확신 있게 하나씩 배워가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마다 빈 곳을 메우며 배우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걸 느껴요.” 그러기에 흥행성이나 예산 규모가 아닌, 작품 자체의 완결성과 재미, 배역에 주안점을 두어 작품을 찾아간다. 필모그라피 한 줄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배우로 서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이다. 보이는 것에 집중하던 데에서 벗어나, 배우란 무엇이며 배역에는 어떤 마음을 품고 접근해야 하는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와 상대 배우와 호흡하며 만들어내는 앙상블이란 또 무엇인지 등을 조금씩 배운다. 아마도 그 때문에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달린다는 말은 저에게 어울리진 않는 것 같아요. 저는 독하게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꾸준하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는 거죠.”








나의 보폭을 맞춰 걷는 하나님

“제가 이런 걸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조금 부끄러워서요. 말씀드릴 수 있는 것도 없고요.”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자신의 신앙은 꺼내어 말할 것이 못 된다며 민망해했다. 촬영 일정 때문에 주일예배도 제때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속에 품은 마음을 감추지는 않는다. “불같은 체험은 없었지만, 하나님은 가족을 통해 믿게 하셨어요. 가족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보았어요. 기도에 대한 응답이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고 배워 왔어요.”
어머니의 ‘거할 처소’를 위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은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간절히 구한 가족의 기도도 들어주셨다. 우리는 종종 ‘기적’을 만난다. 뇌혈관 이상으로 입원한 아버지가 받을 수술은 도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해서 병원 관계자도 쉽게 권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기도 중에 얻은 확신을 품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의사들이 와서 보고 갈 만큼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막힌 뇌혈관 주위로 혈액이 우회하기에 충분한 모세혈관이 수없이 많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 ‘기적’은 조은지와 가족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누군가는 ‘설마’하고 지날 일이 나에게는 분명한 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남는다.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은 자신과 항상 함께 대화하며 살아가길 바라신다. “며칠 전에 밖에 나가려고 신을 신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내가 지금 행복하구나. 그런데 그걸 즐기지 못하고 있구나. 이런 나를 아시고 하나님은 약간의 시련을 주시는구나’ 하고요.” 사람이란 어찌나 약한 존재인지, 기댈 일이 생겨야 하나님을 찾는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긴장과 기대를 오갈 때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하는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고 깨달으며 하루의 삶을 이어간다.
“제가 부족하고 성실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제겐 신앙이 있어요. 하나님이 함께하고 또 계속 함께하실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수상대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조차 쉽지 않은 사람이 있다. 제 신앙을 굳이 밝힐 필요가 있느냐는 말을 시작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듣지만, 감사하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말한다는 그 순전함과 솔직함이 바로 조은지의 매력이 아닐까.


소속사 대표와 연애를 공개한 후로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데이트로 비춰져 공개한 것을 잠시 후회하기도 했었다며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을 나눠준 조은지는 그 사이 허물없이 지내는 친한 언니가 되어 있었다. 가정에서는 막내로 독립하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데, 이 때문에 요즘도 주일예배에 빠진다고 혼나고, 시집 갈 나이가 되었다고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냐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으며 산다고 했다. 친한 동료들과 하루에 말씀 한 구절을 나누기도 하고, 당면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다가 해결되면 감사하고 또 잠시 소홀하기도 하면서 지내는 서른셋의 일상을 엿보고 나니, 앞으로 만날 조은지의 가면이 조금은 말랑하게 느껴질 것 같다.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공로상 받을 때까지 오래 연기 하고 싶다”는 조은지의 꿈 또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