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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영화 속 현실과 만나다

더 테러 라이브, 미디어의 기만을 폭로하다│<더 테러 라이브>(김병우, 2013)



영화의 발단은 테러범의 전화입니다. 테러범 박노규는 라디오 방송 ‘윤영화의 데일리토픽’에 전화를 걸어 방송 주제와 동떨어진 넋두리를 해댑니다. 5년 넘게 마감 뉴스를 진행하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라디오 방송으로 밀려난 국민 앵커 윤영화는, 안 그래도 인생이 짜증 나는 마당에 방송을 꼬이게 하는 박노규 때문에 더 언짢습니다. 끊지 말라는 말을 무시하고 다음 청취자로 전화 연결을 넘겨 버리는 윤영화.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전화는 끊기지 않고 갑자기 박노규의 목소리가 튀어나옵니다. 박노규는 자꾸 전화를 끊으려는 윤영화에게 화를 내며 여차하면 마포대교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합니다. 당연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윤영화는 터뜨려보라며 박노규를 자극하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끊지 마세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설정이자 조건은 전화 통화입니다. 라디오 방송이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고 오직 목소리만 들리는 상황. 박노규는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마포대교 보수 공사를 하던 중 사고로 죽은 일용직 노동자 세 명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대사가 있습니다. 전화를 끊지 말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는 뜻이지만, 어쩌면 더 중요했던 건 말 그대로 ‘말을 들어 달라’는 아주 단순한 요청이었을지 모릅니다. 사고 발생 당시 간절하게 구조를 요청했지만 외면 당해 허무하게 죽어 간 이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달라는 간곡한 호소였다는 말입니다. ‘보는’ TV가 아니라 ‘들리는’ 라디오 방송으로 영화의 배경을 설정한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미디어, 그 교묘한 기만의 작동 방식
라디오 부스 밖
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생명의 위협 때문에 윤영화는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 안에 고립된 채 외로운 사투를 벌입니다. 그는 제한된 조건에서 유도신문과 민첩한 상황 파악을 통해 정보를 조금씩 얻어나가고, 주도권을 쥐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립니다.
여기 또 한 가지 중요한 설정이 있습니다. 그가 정보를 얻는 가장 큰 자료가 스튜디오 안에 설치된 여러 대의 모니터라는 점입니다. 윤영화는 모니터를 통해 마포대교 현장과 사내 뉴스 스튜디오, 타 방송사의 뉴스 스튜디오 등 다양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합니다.
그중 윤영화를 쥐락펴락하는 모니터가 있습니다. 윤영화가 있는 방음 부스 내에 설치된 모니터가 그것입니다. 보도국장을 비롯한 부스 바깥의 인물들은 이 모니터를 통해 ‘충격적’, ‘테러’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하라는 지시를 내리거나, 무궁화 번호판 달린 차량(대통령)이 주차장에 들어왔다는 등의 정보를 단문으로 띄워 윤영화에게 전달하죠. 윤영화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상황에 대처합니다. 그런데 이 모니터가 윤영화의 뒤통수를 때립니다. 보도국장이 윤영화를 안심시키기 위해 마포대교에 인질로 잡혀있는 전(前) 부인 이지수 기자가 무사하다는 거짓말을 모니터를 통해 전달한 것이죠.
또 하나 의미심장한 모니터가 있습니다. 부스 바깥에 있는 여러 대의 모니터 중 하단에 위치한 모니터입니다. 위쪽의 모니터에서 사고 현장 등 상황이 긴박하게 생중계되고 있는 것과 달리, 아래쪽 모니터에는 평화롭게 공원을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모델이 화보 촬영을 하는 모습 등이 방송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군가는 이 긴박한 상황이 아닌 하단의 모니터와 같은 평화로운 장면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죠. 방송사가 어떤 장면을 내보내느냐에 따라 시청자가 전혀 다른 상황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요?



미디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
윤영화가 모니터의 내용을 믿었듯이 우리는 미디어가 내보내는 내용을 신뢰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는 시각적 정보를 신뢰하고요.
폭발로 끊어진 마포대교 끝에 일가족이 탄 자동차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마감 뉴스 진행자 자리를 되찾으려는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최소한의 윤리조차 저버리고 달려가던 윤영화마저도, 모니터로 아직 탈출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 채로 자동차가 한강에 떨어지는 현장을 목격하자 마음이 동요합니다. 이렇게 음성으로 전해들을 때보다 직접 볼 때 인간은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보지 않으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기도 하죠. 본다는 것은 그렇게 강력합니다.
미디어는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말 것을 끊임없이 선별합니다. 그 기준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건이 뉴스로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뉴스 가치는 이해관계가 좌우하죠.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많은 이가 여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제발 내 말을 끊지 말고 들어달라고 절박하게 외치고 있을지 생각해봅니다. 또 어떤 것이 보도되고 어떤 것이 보도되지 않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많은 대안 미디어가 등장해 기존 언론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만큼 언론이 이해관계에 얽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고 긍정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착잡해지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글 최새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