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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어른이 된다는 것

10박 11일

목사님 내외분께서 오랜 숙원이던 성지순례를 떠나셨습니다. 전교인이 3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우리 교회는 목사님의 부재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목사님이 안 계시니 여러모로 예배의 여건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기회 아닌 기회가 생겼습니다. 집회나 기도 모임은 여러 번 가 봤지만 그래도 ‘공예배’라는 단어에는 어딘지 묘한 두근거림을 주는 무엇가가 있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청년 몇 명이 주일에 갈 교회를 선정하기 위해 사전에 모였습니다. 각자 지인이 섬기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어디는 주차장이 넓다더라, 어디는 찬양이 좋다더라, 어디는 청년들이 많다더라… 평상시에는 그런가 보다 했던 이야기들이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화젯거리가 되는 것이, 어쩐지 카탈로그를 보며 쇼핑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물건 고르듯 교회를 골라도 되나 싶은 마음이었죠. 그 때, 누군가의 말이 교회 선정을 돕는 한 마디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갈 순 없잖아?”
지역사회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교회들이 거의 다 회자되고 난 후 8강전, 준결승, 결승의 과정을 거쳐 기독교 TV에 자주 나오는 교회를 마침내 일일 예배 터로 선정했습니다. 하지만 어딘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왜였을까요? 게다가 그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가슴 언저리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유 없이 식빵을 석 장쯤 먹어치우고, 목이 막혀 침이라도 모아 삼키는 기분과도 같았죠. 그렇게 소리 없이 주일은 다가왔습니다.


전교인이 모여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작 예배 시간은 자로 
잰 듯이 한 시간 만에 끝났습니다. 교회의 핵심 인력(?)인 저희는 주변인이 되어 축도가 끝남과 동시에 우르르 빠져나가는 성도의 물결에 합류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가까운 식당에 모여 점심을 먹는데 누군가 이야기 합니다. 골자만 말하자면, ‘큰 교회는 우리가 있으나 없으나 차이가 별로 없다. 차라리 근처 작은 교회에서 예배드렸다면 더 힘이 되지 않았을까’였습니다. 한 주간 얹혀 있던 맘속 식빵 같은 것이 쿡 쑤십니다. 나의 찝찝함의 원인이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우리 교회만 보더라도 그렇고, 작은 교회들이 곳곳에 많은데 왜 우리의 논의에는 대형 교회만 들어 있었을까요?  작은 교회를 섬기는 우리의 마음에도 세상의 커트라인이 존재했던 것이었을까요? 다른 누군가가 말합니다. 작은 교회에 가면 부담스럽다고, 한 번 들러가는 식으로 가기에는 미안하다고. 이어 “우리 교회도 사람들 눈에 그렇게 비치는 거겠지?”라는 물음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모두의 표정이 복잡합니다. 딴에는 개척 교회에 대한 소망이 있고 알찬 교회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세상의 잣대와 편견으로 교회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요.


어느덧 성지순례를 마치고 오신 목사님의 표정에는 은혜와 생기가 넘칩니다. 기념품으로 받은 요단강 물과 순수하고 거룩한 열의로 불타고 계신 목사님의 얼굴을 바라보니 이번 주일예배는 더 길고 뜨거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순수하지 못한 우리는 좀 더 강력하게 회개의 기도를 할 테고요.


주동연| 작심삼일을 겨우 넘긴 네번째 날의 오후, 세상을 움직이기보다는 그저 잘 쓴 글 한줄을 원하는, 오타쿠와 초식남의 경계짓기 어려운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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