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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들다 못해, 흠뻑 젖은 밤” - 가을밤, 물들다를 돌아보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다면, 일찍이 친구들 티켓이라도 준비해 둘 걸 그랬습니다. 빈약한 내 주머니 탈탈 털어서라도 ‘가을밤, 물들다’에 모두 앉혀놓을 걸 그랬습니다. 그만큼 좋았거든요. 세 번째 오늘Day였던 ‘가을밤, 물들다’는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삼 일 연속으로 필름포럼에서 진행됐습니다. 가을이 민망할 만큼, 가을보다 더 가을다운 밤이 되었지요. 태교로도 좋았을 텐데… 임신 7개월인 친한 언니도 부르고, 부산에 사는 부모님은 어쩔 수 없으니 근처에 사는 고모라도 모시고, 그랬어야 했습니다. 나만 본 게 아쉽다 못해 한탄스러우니까요.안미리




결말이 좀 충격인가요?
‘가을밤, 물들다’ 의 첫날은 도널드 밀러의 책 <재즈처럼 하나님은>(원제<blue like jazz>)을 원작으로 한 영화 <블루 라이크 재즈>를 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영화를 관람한 후 곧장 씨네 토크가 잇따랐지요. 이 영화를 볼 독자들을 위해 말을 아끼고 싶지만, 청어람아카데미의 양희송 대표의 말처럼 “상쾌하다”는 표현이 적격인 영화였습니다. 자신을 소수라고 믿고 있는 삐딱한 기독교인이라면, 이 영화를 매개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테죠. 곪을 대로 곪은 우리의 문제는 도외시하고, 세상의 비난에만 발끈하는 게 많이 부끄럽다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만 좀 담대하셔서 선행까지는 못 가더라도 부도덕한 일이나 멈추어 주면 좋겠다고요. 이 깜찍한 영화는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들며 이런 고민을 무겁지 않게 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뒤통수를 치는 결말을 냅니다. “회심 자체에 집중하지 않아요. 그 이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이웃과 살아갈 것인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집중되어 있어요.” 그날 최은 평론가가 한 말처럼 영화는 개인의 실망과 회심에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그게 뭐냐고요? 침묵하겠습니다. 저는 스포일러가 되기 싫으니까요!


가을밤 하면, 격조 있는 음악이지요
두 번째 밤, 인디밴드 라이노 어쿠스틱과 원맨밴드 최성규의 공연으로 채웠습니다. 전날이 영화를 통해서 답답한 속내를 커밍아웃 할 기회였다면, 이날은 노래로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이었어요. 라이노 어쿠스틱이 공연을 시작하자 어찌나 자유롭고 유쾌한지, 홍대의 버스킹을 구경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게다가 완성도 높은 수준하며, 이곳에 자리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뜻한 멜로디는 물안개처럼 무대와 객석을 감쌌지요. 라이노 어쿠스틱이 젊은이들의 달달한 감성을 야무지게 녹여냈다면, 최성규는 헐거운 듯 헐겁지 않은, 아련한 노랫말로 사람들을 끌어당겼습니다. 마술지팡이는 어디서든 휘젓기만 해도 별이 쏟아지잖아요. 최성규의 기타 소리와 노랫말은 꼭 마술지팡이를 휘두른 것처럼 90석의 작은 공간에 추억과 이미지를 선사했습니다. 한 곡 한 곡 다 주머니에 넣고 싶을 만큼, 선물 같은 시간이었어요.
두 팀은 하나님을 언급하는 방식도 많이 달랐는데, 꼭 그들이 하는 노래와도 닮아 있었어요. 라이노 어쿠스틱은 달달하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진짜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건 사랑이야. 이건 사랑이야” 직전에 부른 컨페션(confession)이란 노래가 평범한 사랑 고백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반면 최성규는 자신만의 화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실존을 말했습니다. 말에 맺고 끊음이 분명하지 않았고 숫기 없는 소년처럼 무덤덤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말들은 우리 가슴에 콕콕 박혀 버렸습니다. 그 낮고 낮은 목소리로 자꾸만 웃기기까지 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분, 대.다.나.다.’ 


“한국의 크리스천 영화도 메시지가 있어. 볼 만 해”
마지막 날은 블랙 가스펠. 영화 <블랙 가스펠>은 출연진이 뉴욕 할렘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직접 블랙 가스펠을 배우고 콘서트를 여는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거지만, 흑인 소울에는 역시나 그들만의 ‘뭔가’가 있더라고요. 영화가 끝나고, 출연진이 입장했습니다. 국내 유일의 블랙 가스펠 그룹 헤리티지와 양동근, 정준, 김유미가 들어서자 작은 무대는 꽉 찼습니다. 필름포럼은 작은 영화관이어서 무대의 너비는 물론이고 객석과 무대 사이가 무척 좁거든요. 처음엔 출연진이 관객을 코앞에서 대하는 게 조금 멋쩍어 보이다, 이내 속 깊은 생각을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이 호흡하고 눈을 마주친다는 게 이래서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반인과 연예인이 하나님 얘기를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할 기회는 잘 없을 텐데, 우린 이미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었으니까요. 한 시간이 넘도록 관객은 영화에서 해소되지 않은 부분을 질문하고, 출연진들은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습니다. 특히 정준과 양동근의 나눔은 영화보다 진한 여운을 남겨 주었습니다. 
흑인들이 말하는 조이(joy)는 용서에요. 백인들이 준 아픔을 지금도 보고 있지만, 다 용서한 거예요. 그 가운데 기쁨이 하나님이 주신 상 같았어요. 너희가 용서했으니까, 내가 너희에게 기쁨을 줄게……(정준) 
나는 눈이 멀어 있었어요. 본다고, “I see” 노래를 불렀지만, 보지 못했어요. 나 같은 죄인이 어떤 죄인인지 몰랐어요.(양동근)


관객 150만이 되면, 뉴욕 할렘의 흑인들을 한국으로 초대해서 영화에 나온 그대로 콘서트를 열겠다고 하니 
흑인 소울을, 이곳에서, 우리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 오늘Day, ‘가을밤, 물들다’는 삼 일 내내 곱고 따뜻한 시간이었습니다. 같은 가치를 품고 같은 고민
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리스도인의 문화 축제, 이처럼 탁월한 행사를 또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네 번째 오늘Day가 더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