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전작 <그을린 사랑>에서 서로에 대한 극단적 분노와 증오(특히 종교적 신념으로 인한)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의 악순환을 그립니다.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되며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끔찍한 비극. 감독은 이 악순환을 끊는 해결책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한 여인이자 어머니의 ‘아가페적 사랑’을 제시하죠. 그런데 오늘 소개할 <프리즈너스>는 도리어 그 사랑이 인간을 아득한 죄의 미로로 어떻게 몰아넣는지 보여줍니다.


내 딸이 유괴되었다!
“해피 땡스기빙!” 추수감사절을 맞아 가족과 함께 친구인 프랭클린의 집에 놀러 간 켈러의 가족. 두 가족이 함께 행복한 한때를 보내던 것도 잠시, 빨간 호루라기를 찾으러 집에 간다던 켈러의 딸 애나와 프랭클린의 딸 조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애나의 오빠인 랄프는 직감적으로 산책 중 마주친 의문의 캠핑카를 지목하고 형사는 곧 두 아이를 찾기 위한 수사를 시작합니다. 수사를 맡은 베테랑 형사 로키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캠핑카 주인 알렉스를 체포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어쩔 수 없이 풀어주고 마는데요. 이 때문에 범인이 알렉스라고 확신하는 켈러는 더 이상 경찰에 맡기고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에 직접 찾아 나섭니다. 급기야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비밀리에 알렉스를 감금한 뒤 고문까지 하는 켈러.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는 프랭클린에게 켈러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이놈은 인간이 아니야.” 자식을 뺏긴 켈러의 애끓는 부정(父情)에 공감하던 관객은 이 순간부터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죄의 미로에 갇히다
고문은 점점 잔인해지지만 켈러
는 10살 이하의 지능인 알렉스에게서 아무런 실마리도 얻어내지 못한 채 지쳐갑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주저앉아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는 켈러.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대목에 이르자 더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딸을 구한다는 명분 아래 알렉스를 무참히 고문한 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인식합니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해버린 켈러. 그가 저지른 짓은 자신의 딸을 유괴한 범인의 악행과 과연 얼마나 다른 걸까요?
감독은 인간의 심연에 숨죽이고 있는 악마성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의도적으로 켈러라는 인물을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매우 도덕적인 인물로 그립니다. 그래서 잔인하게 변해가는 켈러의 모습은 영화 초반부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죠. 그런데 죄의 미로에 갇힌 사람은 켈러뿐만 아닙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수감자들’이죠. 켈러만큼이나 필사적으로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 나서는 형사 로키는 영화 초반 철저히 법을 준수하며 수사하는 듯하지만, 소싯적에 악명 높은 소년원에 수용됐던 경험이 있는 인물입니다. 로키는 용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또 다른 유력한 용의자 밥이 자살하게 하는 실수도 저지르죠.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고문을 도운 프랭클린은 또 어떤가요? 가장 아이러니한 인물은 용의 선상에 오른 또 다른 인물 던 신부입니다. 성범죄 전과가 있는데다 알코올 중독자인 그는 한 남자가 16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죽였다며 고해성사를 하자 속죄를 선언하는 대신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살인을 저지르죠.
마침내 감독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아이가 유괴 당한다면, 당신은 과연 어떨까요?




내 안의 폭력성을 인식하기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죄
를 짓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것일 테고요. 자, 그러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성경 구절로 모두의 죄를 퉁치자는 걸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감독은 인간의 심연이 얼마나 어둡고 깊은지,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직시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지도 깨닫게 만들죠. 가장 중요한 건 타자화하지 않고 ‘나’ 또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악마성이 있는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쉽게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온갖 끔찍한 형벌을 내리라고 저주하죠. “그건 인간도 아니다”라는 말을 하면서요. 무서운 것은 역사 이래 벌어진,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를 불러올 정도로 끔찍했던 일들은 모두 나름의 ‘정당화’ 아래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 911테러 이후 제정한 일명 ‘애국자법’으로 인해 벌어진 미국 사회의 무슬림에 대한 폭력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두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될 때 벌어지는 일이죠. 알렉스를 잔인하게 고문했던 켈러처럼요.


내 안에 잠재된 폭력성을 인식하고 민감해질 때 우리는 우리 안의 악마를 다스릴 수 있을 겁니다.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겠지요. 성적 · 언어적 · 구조적 폭력, 이 모든 것이 폭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게끔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까지. 그렇게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기를 때라야 우리는 더 깊이 주기도문을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켈러가 반복해 암송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습관적으로 외는 주기도문의 그 구절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리고 알겠지요.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최새롬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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