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인터뷰

80호_시선을 달리하면 다르게 보인다

손정옥. 《오늘》 2014년 1-2월호 인터뷰이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뒤늦게 검정고시를 친 큰아들 일선과 둘째 아들 일권, 셋째 딸 예진의 엄마. 자아를 찾는다는 목표 아래 부모와 충돌하고 집 밖으로 맴돌던 일선이 이제는 어머니와 밤새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하기까지, 어머니와 아들의 시간은 어떠했을까. 




지난 인터뷰를 보고 일선 씨의 부모님이 궁금했어요.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하면 일선이에 대한 기대나 생각조차 없다고 느낄까 봐 한다고 했어요. 세상의 기준에서 자랑할 것이 없지만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어떠했고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잘 자라준 일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고요.


아들의 청소년기가 여전히 생생하죠?

일선이가 청소년기에 열병을 앓았죠. 싸움에 말려 친구가 다친 것도 그 이유지만, 그전에 IMF로 우리 집 경제가 무너졌어요. 갈 곳이 없어져 버렸죠. 그때 그 아이가 하나님께 등을 돌렸어요. 열심히 믿었더니 이게 뭔가, 그러면서 반항이 시작됐어요. 초등학생 때까진 잘 커왔거든요. 물론 어렸을 때부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뭔가에 집착하고 자기가 해야겠다 싶으면 해내고야 마는 면이 있었어요. 서로 용납할 수 없었고 “너는 왜 그러니?” 그런 말을 자주 했어요. 


일선 씨는 이제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던데요?

예전에는 상처되는 말을 아이와 서로 받아쳤어요. 일선이는 물질적인 것이 끊기고 공부하던 페이스를 잃고, 모든 것이 바닥이었어요. 당시 힙합바지와 노랑머리가 유행이었는데 그걸 하고 싶어 했고 반듯한 것을 원했던 우리는 제재했죠. 그게 분노로 남겨졌는데 그런 채 대면하니까 당연히 불꽃이 튈 수밖에요. 그래서 제가 상담을 요청했어요. 저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거든요. 


함께 상담을 받으면서 좋아졌어요?

청소년수련관에서 10개월 간 각자 상담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모범적이고 화목하게 보이는 기독교 가정에 그 아이가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라 생각했어요. 쟤 때문에 힘들다고 푸념했던 것이 동생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어요. 동생들이 형만 없으면, 오빠만 없으면 집이 조용할 텐데 그러더라고요. 상담을 받으면서 이 아이가 쿨하고 멋진 엄마를 만났으면 날개를 달았을 텐데, 내가 모든 것을 제한했구나 싶었죠. 이 아이를 밀어내고 있고 동생들에게도 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셨어요. 너는 힘들 때마다 기도하면 평안하다, 하지만 네 아들 그 일선이의 유리(遊離)함을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이요. 그때부터 동생들에게 내가 첫째에게 미안한 것이 많고, 이런 점 때문에 그 아이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어요. 어느 날 유아교육을 공부하던 딸이 그래요. 엄마의 피그말리온 효과가 오빠한테 영향을 준 것 같다, 엄마가 오빠는 괜찮은 애라고 표현할 때마다 자신도 치유 받고 오빠도 치유 받고, 엄마에게도 그런 것 같다고요. 



마음이 치유되고 상황이 조금씩 바뀌었나요?

일선이가 군대에 평범하게 못 갔어요. 눈이 나빠서 공익으로 갔는데 5일 만에 다시 온 거예요. 공부도 중간에 멈추고… 모든 것을 끝을 못 보고, 이젠 군대도 제대로 못 가나 해서 막 화를 냈더니, 얘가 돌발적인 화를 냈어요. 자기도 힘들었다고,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냐고요. 아이는 아이대로 한 달도 버티지 못한 것이 괴로웠을 텐데 우리는 우리 생각만 했어요. 그 후로 공백기가 길었죠. 다시 입대 하기 위해 기다려야 했어요. 다른 애들 2년 갈 때 얘는 4년 걸렸죠.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해요. 자기는 되는 일이 없다고 자기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고요. 나중에 진짜 속내를 들어보니 지금까지 자기를 찾는 훈련을 책을 통해 해왔다는 거예요. 내 입장에선 하나도 변한 것이 없어 보였어요. 꾸준히 이 아이와 계속 대화하고 내면을 끌어내면서 스물서너 살 되었을 때야 ‘멋지게 잘 컸구나’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들었어요.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어요. 외할아버지는 스님이었죠. 불교 집안이었는데 중학생 때 집이 망했어요. 동두천의 산이 있는 허허벌판에서 차비 없이 학교에 다녔죠. 그럼에도 어둡고 억센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 덕이에요. 우리 집 경제가 무너졌을 때 우리가 아이들을 억세게 대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고요. 제가 아픔을 딛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인데 아이에게도 그걸 요구했어요. 그런데 나는 스스로 믿음이 있다지만 어떨 땐 이 아이가 믿음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일선이가 그래요. 엄마는 믿음이 있다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왜 못 기다리느냐, 나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데 왜 기다리지 못하느냐고요. 교회를 안 다니다가 스물일곱에 일선이가 자기 발로 교회에 갔어요. 감사해야 할 일인데 엄마는 한 단계를 더 원한다는 것이죠. 그건 결과적으로 믿음이 없는 행동이었어요. 잠자리 눈이 360도를 돈다고 해요. 하지만 우리 눈은 뒤를 못 봐요. 사람의 감춰진 부분을 못 보니까 불안한 거고요. 하나님은 저 아이가 선물이라는데 나는 잠잠히 기다려주지 못했어요. 그걸 알고부터 일선이가 자기 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만만한 부분에 대해 인정하게 되었어요. 내면 아이를 바라보는 눈높이가 달라졌죠. 친구들에게는 스펙 좋은 자녀들이 있어요. 저는 우리 일선이가 그 틈에서도 생각이라든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하는 고민이 당당할 수 있다고 믿어요. 일선이가 자기 생각,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에 점수를 줘야 해요. 


어머니의 꿈은 무엇인가요?

교사가 되고 싶어서 아이들 다 키워놓고 방송통신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했어요. 직장을 다녔고 부모님이 암 투병하던 때라 몸은 바빴고 마음도 어려웠어요. 그런 와중에 공부하면서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줬어요. 그때 공부하면서 지난 시간 우리가 힘들었던 시절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일선이는 이미 청년이 되었을 때죠. 제게도 그 격동기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거예요. 4년 후에 일선이도 방통대 통계학과에 입학했는데 그만뒀어요. 오랫동안 진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면서 다음 해에 재입학했고 지금은 교육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어요. 아직 자신이 왜 그걸 공부하는지 모르겠다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될 일일 거예요. 



하나 낳아 잘 키우던 시절에 무모하게 세 아이를 낳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렇기에 세 아이가 모두 선물이라고 했다.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녀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선물이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그녀 마음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지만 눈물로 그 마음을 닦는 동안, 그렇게나 반짝이는 눈동자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일선은 검사 앞으로 부모를 불러 세웠고 경찰서 구경을 간간이 시켜주었지만 어쩌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몸소 체험해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는 청년이 되고부터 짜장면 배달부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공장 일까지 다양한 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자기를 알기 위해 차곡차곡 책을 읽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속으로 낳은 아들의 마음을 몰랐다는 것을 아들과 오래 싸우고 길게 이야기하면서 알게 됐다. 가족은 가깝기에 쉽게 상처 주고받는 위험 공동체다. 그 불협화음의 테두리 안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다른 시선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 이제 서른을 넘긴 일선이가 가장 많이 대화하는 상대가 어머니인 사실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남편이 퇴근할 때면 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오는 기쁨을 누린 지 31년. 차가 있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던 그녀는 결핍이 가져다준 일상을 소소하게 누리며 살고 있다. 그녀는 앞으로 남은 시간을 이대로 머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이를 다시 낳으면 잘 키울 자신이 있다는 진담 같은 농담을 했고,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방통대 시험을 보려고 전철을 탔어요. 60대 중반 할머니가 낡은 운동복을 입고 배낭을 메고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남루한 차림의 그 할머니가 다름 아닌 시험장에 들어설 때 충격을 받았어요. 나이가 들면 젊을 때보다 뭔가를 할 기회가 줄어든다잖아요? 실은 그게 아니에요. 그 할머니 보면서 깨달았어요. 뭐 대단한 것을 하자고 결의하는 게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은 것을 찾겠다고 다짐했죠.”



글 . 곽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