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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인터뷰

80호_창연 씨의 그림 그리는 일상

서른이 되던 해 인도와 네팔을 여행한 그녀의 기록이 책으로 나왔다.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을 담은 이 책은 마치 그녀의 성장기를 보는 것 같다. 그녀는 낮과 밤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낮에는 병원에서 흰 가운을 걸친 물리치료사로, 밤이면 자신의 방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그녀. 그림 그리는 물리치료사 최창연 씨를 만났다.




물리치료사이면서 그림도 그리다니, 매력적이네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기소개는 어떻게 하나요?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보통 업무상으로 만나면 물리치료사라고 해요. 병원 명함이 있는데 늘 사용하지도 않아요. 물리치료사라는 직함이 최창연이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공통분모가 있고,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저 그림도 그려요~’라고 숨은 정체를 밝혀요. 


그림이라는 게 단시간에 실력이 느는 건 아니잖아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나요?

어려서 미술학원에 다닌 적은 없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기는 했던 것 같아요. 대회 나가면 상도 타오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저희 엄마는 미술은 잘하니까 배울 필요 없고 부족한 수학이나 음악을 배우라고 하셨어요. 어른들은 대부분 미술은 배우는 데도 돈이 많이 들고 앞날이 안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시잖아요. 저의 장래를 생각하시는 엄마의 선택사항에 없던 거죠. 그냥 끄적거리는 정도 하다가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건 한 5년 정도 됐어요.


물리치료사로 일하면서 그림 그리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병원에서 수술 후 환자들의 재활을 돕는 통증치료와 운동치료를 처치해요. 대부분 몸이 불편하니까 다른 사람 처지를 생각하기 힘든 분들이에요. 그래서 저를 나사처럼 작은 부품처럼 여기는 분들도 있어요. 몸이 힘들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통증과 아픔을 그저 일로 처리하게 돼요.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이나 반응해 줄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드는 것도 저를 힘들게 했어요. 감정이 메말라 가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힘들기보다는 오히려 저에게 탈출구예요.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궁금해요. 

저와 같은 그림을 그려요. 굉장히 일상적인. 어떤 사람들은 예술적인 난도가 있는 표현을 하는데 저는 제 삶과 가까운 것들을 그리는 게 좋아요. 내 방 안에 있는 물건이나, 지금 보이는 창밖의 풍경 같은 거요. 


여행한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던데 여행을 좋아하나요?

자주 하지는 못하지만 좋아해요. 계획 세우는 건 좋아하지 않는데 낯선 환경에서 즐겁게 보내는 재주는 있거든요. 인도를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막연하지만 인도라면 좀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면서요. 세 번째 가는 배낭여행이라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럼 인도는 책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하고 간 건가요?

책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글과 그림을 남겨 놓으면 그것도 추억이 되니까, 반반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가는 날부터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어요. 인도에 도착했는데 제 상상과 다른 풍경에 당황했고, 함께 간 일행은 첫날 요로결석으로 한밤중에 응급실에 다녀오기도 했어요. 맘껏 그림 그리고 사색도 즐기는 여행이 될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긴장할 일이 생기고 나니까 책은 포기가 되더라구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하고 마음도 편해졌지만요. 책에 대한 욕심을 버려서인지 그냥 그 시간을 즐기고 나만의 기록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여유를 생각하며 인도를 선택했다고 했잖아요. 정말 그 이유 하나였나요? 

유럽에 가고 싶었어요. 예전부터 유럽은 꼭 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었고, 막연히 동경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여행경비가 비싸기도 했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니까 제대로 준비해서 가야겠다며 아껴두기로 했어요. 그리고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다가 인도를 발견한 거죠. 너무 많이 알려지거나 관광 상품이 발달한 곳은 피했어요. 결정적으로 나만의 ‘김종욱’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죠.(웃음) <김종욱 찾기>에서 인도는 여자 주인공이 김종욱을 만나는 장소잖아요. 


그래서 창연 씨의 김종욱은 만났나요?

뮤지컬이나 영화에서 진짜 김종욱은 여자 주인공의 운명의 상대가 아니었듯 저의 운명의 남자도 인도에는 없더라고요.(웃음) 남자는 만나지 못했지만 운명 같은 인도를 만나고, 그곳에서 저 자신을 만나고 왔어요. 그동안 저는 ‘괜찮아’라며 쿨한 척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웠죠. 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요. 꼭 내가 단단해질 필요는 없고 그냥 이렇게 나답게 살면 되는 거였어요. 그러다 힘들면 그때 또 떠나도 괜찮을 테니까요. 



책 제목이 〈나의 서른이 좋다〉예요. 좋다고 했던 그 서른은 과거가 됐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그땐 나이의 적정선이 서른이라고 생각했어요. 30이라는 숫자에 완벽함도 느껴졌고요. 적당히 알건 아는, 선택의 폭이 넓은 나이라 여겼어요.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 기대되고 내 삶이 장밋빛일 것만 같았죠. 물론 지금은 달라졌어요. 앞으로의 내 인생이 평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아는 거죠. 또 평탄하지 않은 길을 걸어갈 힘이 있다는 것도 알아요. 내 삶을 과하게 포장하거나 격하시킬 필요는 없어요. 삶이 좋아서 좋은 게 아니라 ‘좋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제가 선택한 거예요. 영원한 것도 없고, 당연한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많이 감동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계획을 하고 있나요?

지금 사는 원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30대를 과대 포장해서 보여줘요. 그래서 그냥 평범한 30대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사실은 나도 그래~,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라고 말하는 거죠. 내년에 원룸 계약이 끝나는데 책의 마무리가 원룸탈출, 결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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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누나>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 씨는 60이 되어도 인생을 모른다고 한다. “나도 67살이 처음이야”라며. 누구나 태어나 처음 살아보는 인생, 그러니 살아봐야 아는 거다. 백 명의 사람이 이렇다더라 말하는 것이 모두의 답은 아닐 테니까. 누구나 자기만의 답을 찾는 과정을 겪는다. 그림 그리기는 대상을 관찰하고 오래도록 공들여 보는 정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창연 씨는 그림 그리기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과 닮은 그림을 그리며 그녀만의 인생의 답을 찾는 중인지도 모른다. 



글 . 박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