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을 읽다/어른이 된다는 것

거룩한 뒷담화 2ㅣ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자


앞치마에 젖은 손을 탁탁 털고, 휴우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는다. 오후 2시. K권사의 고된 식사 당번이 끝났다. 평일에는 목사님 심방 따라다니고, 전도도 하느라 바쁘지만 특별히 주일이면 더욱 바쁜 그녀. 게다가 식사 당번 하는 날이면 오전 예배는 당연히 건너 뛸 수밖에 없다. 얼굴은 뜨거운 주방의 열기로 벌겋게 달아오르고 온 몸이 흠뻑 젖도록 일하고 나면 그야말로 탈진상태. 게다가 평상시 말썽이던 다리는 더욱 쑤신다. 이럴 때는 정말 쉬고 싶은 생각이 가득하다. 그래도 예배 한번 제대로 못 드렸으니까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며 오후예배를 간신히 드리고, 집에 들어와서는 이내 곯아떨어진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거실이 웅성웅성, 식구들의 밥 달라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냥 묵묵히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니들이 좀 차려먹어라. 응?”

이제 막 여선교회에 발을 디딘 새내기 주부 L성도.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 묵묵히 설거지를 한다. 티 나게 요리 솜씨가 좋은 것도 아니고, 주방의 서열상(!) 새내기 주부에겐 설거지가 최고다. 사실 그녀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청년부 리더였다. 청년부에서 함께 지내온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직후 여전도회에 들어왔고, 그녀 역시 피할 수 없는(?) 식사 당번의 길에 들어섰다. 청년 시절,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언젠가 참여할 이 고난의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는데 실제 들어와 보니 정말 장난이 아니다. 갑자기 바깥에서 웃고 떠들며 앉아서 식사하는 청년들이 왜 그렇게 부러운지. 기쁘고 즐겁게 준비해야 할 식사가 어느 순간 마음의 짐이 되어 버렸다. 성경 속, 마르다의 심정이 막 이해되면서 착하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가 원망스럽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주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아, 난 정말 놀부 심보인가.

각종 수련회나 특별 기도회, 교회에서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 행사 후에는 반드시 따라오는 식당 봉사. 컨디션이 좋을 때는 기쁨과 감사로 감당하지만, 매 순간이 좋을 수만은 없다. 특별히 요즘같이 맞벌이 부부가 많은 때에는 늘 수고 하는 몇몇 분들에게 일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식당 봉사, 이제는 그녀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너무 믿음 없는 소린가. ‘자, 이제부터 접시를 깨자’고 했던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그녀들도 주일날 예쁘게 거울 볼 시간이 필요하다. 교회의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그들의 밥상을 차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음식 냄새가 온 몸에 배고 파김치가 되어 예배를 드리러 올라가는 지친 어깨의 그녀들을 돕는 건, 아니 그녀들과 함께 하는 건 이제 교회의 필수 감각이 아닐까. 어느 교회에서는 이렇게 안쓰러운 아내들을 돕고자 남편들이 남선교회 차원에서 나서서 설거지를 맡기도 한다고. 그러나 여전히 같은 시간, 대부분의 다른 교회에서는 그런 시도들이 어색하고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함께 준비하고, 함께 나누는 식탁 공동체, 그 길은 아직 멀고도 먼 나라의 일일까?

늘 돌아오는 주일, 식사 당번 외에도 각종 크고 작은 교회의 행사의 준비로 수고를 다하는 집사님들, 권사님들께 환하게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건 어떨까. “오늘은 음식이 별로네, 밥은 좀 되네, 이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나?” 라고 평가하기보다는 “정말 맛있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라고 멋지게 표현해보자. 표현하는 것이 신앙이고, 신앙인이다. 우리 주님도 표현하는 자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으셨는가.


배성분|청년부 회장으로, 아동부 교사로 쉴 틈 없는 주일을 보낸다. 그래도 교회를 섬기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도 퇴근 후 임원 회의를 하러 교회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