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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송만 부르면 끝?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4, 5회씩 볼 정도의 Big-Fan으로서 영화 <밀양>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제목이 <밀양>이라는 것과, 전도연, 송강호씨가 주연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일체의 정보를 차단한 채 극장을 찾았다. 반 기독교적인 영화라는 교계의 반발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에 대한 그 어떤 사전 정보를 봉쇄한 나는 '있는 그대로' 영화를 즐기기로 했다. 역시나 원하는 Well-made 이상의 'Wonderful-made'였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 나는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편했던 영화, <밀양>
<다빈치 코드>가 반기독교적 소재의 오락영화 수준이라면, 이 영화는 충격적이리만큼 무시무시하다. 이 영화가 무서운 것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나 직접적 공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가히 다큐멘터리 수준으로 기독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적나라한 것’과 ‘정확한 것’은 물론 다르다. 하지만 나는 보는 내내 불편했다. 전도연에게서, 송강호에게서, 전도하는 약사 집사님에게서, 유혹당하는 장로님에게서, 통성 기도하는 성도들에게서, 손들고 찬양하는 찬양팀에게서, 예배를 집전하는 목사님에게서, 소그룹 모임을 하는 신도들에게서, 심지어 유괴 살인범에게서…. 여러 가지의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대다수의 그들 기독교인들은 나쁜 크리스천이 아니다. 평범하고 모범적이고, 그리고 광신도는 더더욱 아닌, 전형적인 기독교인일 뿐이다. 그런데 관객이 되어 밖에서 들여다보니 이상하게도 그렇게 보이더라(제발 나만 그런 거라고 말해주시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영화를 통해 나는 크게 두 가지의 물음 앞에 서 있다. “사람의 다친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료해 줄 수 있는 건 누구인가?” “사람이 근본적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게 가능한가?” 이다. 이런 어리석고 믿음 없는 질문이 어디 있나 질책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일단 첫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 이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 믿으면 당연히 가능’ 이라고 하면 될까? 물론 이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당연하고도 일반적인 답이지만, 또 동시에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우리의 결정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인생사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설명하려 드는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섣부른 위로는 자칫 상처 입은 자에게 고스란히 폭력이 될 수 있다. ‘좋은 관점은 같은 입장만 못하다’는 격언을 한국 교회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축복송 넘치는 한국교회?
영화 속에서 교회 성도들은 생일을 맞은 전도연을 축하해 주며 '축복송'을 불러준다.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고, 또 그들은 나름대로 순수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자꾸만 ‘가식’처럼 보이기만 했다. 축복송이 과연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 줄 수 있나? 혹은 최소한 마음의 위로나 치료가 일부라도 가능하긴 한 걸까? 이 부분을 고민하다 재미있고도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불리고 있는 대부분의 노래(찬송가를 포함하여)는 90% 이상이 외국 번역곡이다. 그런데 유독 우리 것이 강세인 분야가 있다. 다름 아닌 ‘축복송’이다. 혹시 외국 곡 중에서 기억나는 축복송이 있으신가? 나름 이 분야의 전문가인 내 기억도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정도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한국 곡들은 ‘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형제의 모습 속에’, ‘때로는 너의 앞에’, ‘축복하소서’, ‘날 사랑하신’, ‘아주 먼 옛날’, ‘기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그의 생각’, ‘축복의 통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야베스의 기도’, ‘야곱의 축복’ 등이다. 실제로 악보집 <시와 찬미 7>에서 ‘축복과 교제’로 분류된 38곡 중에서 외국 곡은 5곡뿐이었다.
IMF이후, 소위 ‘축복송은 만들면 뜬다’는 식의 한국 교회의 특수하고도 비정상적인 상황은 기복적, 현세주의적 번영복음이나 고지주의와 맞물려 있다. 어려운 시기에 거짓 선지자는 평안과 위로를 말하고, 참선지자는 홀로 서서 공의를 외친다. 당신과 나는 참된 선지자인가 거짓 선지자인가? 누군가의 고통과 다친 마음, 상처 입은 영혼 앞에서 무책임하고 얄팍한 위로로 우리의 모든 소임을 다 했다고 혹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얘기가 가슴을 친다. 행함과 진실함이 결여된 축복송은 허공을 치는 메아리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한번 손 뻗어 미소 지으며 불러주는 축복송보다도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 그리고 실제적 도움이 더 필요하다.


P.S 사역 15년 만에 근래 2곡의 축복송을 만들었다. 한 곡은 내가 인도하는 찬미목요예배의 새 가족 환영송이고, 또 한 곡은 ‘당신이 특별한 이유는 당신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란 가사의, 장애우를 비롯한 소외받는 지체들을 위한 노래였는데 ‘당신’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지인들이 축복송으로 분류하며 변절자라 놀리더라. 억울하지만 은근히 ‘뜨기’를 바라는 나 역시 거짓 선지자에 불과한 건가. 참 어렵다.



민호기|소망의 바다 사역과 함께 찬미선교단 리더로, 대신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로, 오늘도 세상과 소통하는 음악을 위해 밤새워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