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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TV 상자 펼치기

TV 상자 펼치기 6ㅣ그들이 남장(男裝)을 자처한 까닭은?

일 년에 단 두 차례만 문을 여는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올 가을 기획전은 유달리 북새통을 이루었다 한다. 개관 일에 무려 2만 명이 다녀갔다 하니 얼마나 성황이었는지 익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 같은 대중의 열렬한 관심이 반갑기는 해도 그것이 한국 고미술에 대한 애정이기 보다는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영화 <미인도>의 주인공인 혜원 신윤복에게 쏠린 관심인지라 한편으론 씁쓸할밖에. 특히 드라마와 영화가 모두 신윤복을 남자가 아닌 여자로 못 박고 있기에 선입견을 갖고 그림을 감상한 관람객들도 꽤 있지 싶다. 많은 전시물 중에서도 스틸 컷으로 쓰인 혜원의 ‘미인도’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감상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니 말이다.

그들이 남장을 택한 이유
문제의 ‘미인도’에 혜원이 붙인 칠언시, “얇은 저고리 밑, 가슴 속 가득한 정을 붓끝으로 전하노라”라는 글귀에서 시작된 상상력이 결국 신윤복을 남장 여자로 바꾸어 놓은 계기이리라. 남자의 그림이라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섬세한 필치와 묘사이기에 여자인 작가가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그린 게 아닐까 의심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미술 애호가들 입장에서는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칭해지는 신윤복의 작품과 대중문화가 불러온 성정체성의 호기심이 맞물린 상황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든 영화든, 극중 여자인 신윤복이 남장을 하게 되는 연유는 같다. 그림 그리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여자의 그림이 금기시 되던 시절인지라 도화서에 들어가기 위해 남장을 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드라마에서 흔히 접하는 남장여자 캐릭터들은 대부분 성정체성 때문이 아니라, 불가피한 개인 사정 때문에 남자 옷을 입는다. 예를 들면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극중 소녀가장으로 나오는 고은찬(윤은혜)도 돈을 버는 데에 용이해서 남자를 자처했고 <쾌도 홍길동>에서 멸문지화를 당한 가문의 한 점 남은 혈육으로 나온 허이녹(성유리) 또한 살아남기 위해 남자처럼 행동했다. 따라서 겉모양은 남자 옷을 입고 있어도 속속들이 여자인 그녀들은 드라마 속에서 각기 남자인 한결(공유)과 홍길동(강지환)을 사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삼각관계로 얽히는 한성(이선균)이나 창휘(장근석)도 물론 남자다. 그런가하면 내가 최초로 접한 남장여자 캐릭터인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 역시 신윤복처럼 필요에 의해 남자로 길러진 인물이었고 역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여성으로 당당히 나설 수 없음을 괴로워했다. 만화를 보다 어린 마음에 오스칼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빨리 여자라는 사실을 밝혀, 오스칼!”하고 부르짖었던 기억이 난다.

남장여자의 한계성
그러나 이번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문근영)은 스승인 김홍도(박신양) 외에 여자인 기생 정향(문채원)과도 묘한 애정라인을 만들어 양성애를 보여주는 바람에 한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우리나라 드라마 역사상 이처럼 양성애를 내놓고 드러낸 설정은 처음이지 싶다. 그러나 정신의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음양의 양면이 공존하는지라 양성애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고, 더구나 개인의 성적 취향을 두고 옳다 그르다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하지만 굳이 여성 캐릭터에게 남장을 시키는 이유가 단지 흥미를 위해서라면 실제로 자신의 성정체성으로 인해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엄청난 실례가 아닐는지.
어찌 보면 대중문화 안에서의 여장남자 캐릭터는 남장여자 쪽보다는 훨씬 진지하다.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미세스 다웃 파이어>나 안재욱 주연의 <찜>처럼 필요에 의해서 여장을 하는 코믹 설정도 있지만 <왕의 남자>의 공길(이준기)이나 패왕별희의 두이(장국영)처럼 성별은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속내는 여성이기에 남자를 사랑하며 괴로워하는 주인공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필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남장여성이 아니라 남성성을 갖고 진정으로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 캐릭터도 나와 줄 법한데 그 같은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엔 아직 갈 길이 먼 모양이다.

정석희|TV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대표 주부이자 <우먼센스>, <좋은생각>, <매거진T>등의 매체에 글을 쓰는 방송 칼럼니스트. 아줌마의 눈높이로 본 TV 속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재치 있는 입담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재미나게 풀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