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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모탕의 노래 1ㅣ아버지의 손

선선한 가을 날 아침. 모의고사 결과가 비교적 좋게 나온 기념으로 우리 반 친구들과 녹차호떡 잔치를 하였다. 호떡을 맛나게 먹고 기분 좋게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정규였다. 옆자리 친구가 깨우자 정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두리번거리던 정규의 얼굴이 화가 난 표정으로 변했다. 와르르 웃던 우리들은 정규의 표정을 보고 이내 머쓱해졌고, 다시 수업은 진행되었다. 십 분쯤 지났을까? 또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또 옆자리 친구가 정규를 깨웠다. 나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정규를 바라보다 칠판에 판서를 하려고 돌아섰다. 그때 큰 소리로 ‘아이 씨-’하는 소리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순간 교실 안은 썰렁해졌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머금은 채 돌아서서 말했다.

“아이 씨? 정규가 영어를 잘 하는군. I see, 다 알았다는 이야기지? 그래 졸리면 세수하고 와라.”

아이들도 어색하게 웃어주었으나 정규는 세수를 하러 나가지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벌겋게 된 얼굴을 하고 책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또 십 분쯤 지났을까? 다시 울리기 시작한 코 고는 소리. 이번에는 옆자리 친구도 깨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내가 다가가서 어깨를 흔들었다. 눈을 뜬 정규는 나를 보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책상에 박아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평상심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면서 겨우 수업을 마친 뒤 교무실에서 정규와 마주 앉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사과는 나중에 하고, 너 혹시 선생님과 풀어야 할 것 있냐?”

“아니요. 실은 어제 아버지께서 제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셨어요. 성적이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워낙 제 성적이 바닥이라서 대학 가기는 어렵다고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성적이 좋지 않아도 별로 화를 내지 않으셨어요. 늘 어려운 형편에 건강하게 자라준 것만 해도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어제는 약주를 드셔서 그런지 성적표를 보고 화를 내셨어요. 했던 이야기를 자꾸 반복하셨어요. 고개를 숙인 채로 그냥 듣고만 있다가 문득 아버지의 손을 보게 되었어요. 평소에 제대로 보지 않았던 아버지의 손을 봤어요. 선생님도 아시지만 저의 아버지는 노동일을 하시잖아요.”

정규가 바라본 아버지의 굵은 손은 막노동의 세월이 그대로 묻어 있는 험한 손이었다고 한다.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바라보니 울고 계셨다고 한다. 정규도 눈물이 쏟아져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평생 처음으로 어제 밤새워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가 수업 시간에 잠을 자버렸어요. 저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하루도 못 버티고 쓰러지는 제 자신이 너무 미웠어요. 아버지는 평생 저를 위해….”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정규의 손을 잡고 나는 말했다.

“정규 아버지는 참 좋은 아들을 두셨구나. 그런데 정규야. 선생님이 충고 하나 하자. 너는 너에게 화를 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수업 시간에 너를 야단치는 악역은 선생님들에게 맡겼으면 좋겠다. 너는 공부하기 위해 애쓰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다. 네가 책상에 머리를 박아대니까 내가 할 일이 없더라. 아! 그리고 오로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열심히 공부하면 얻을 수 있는 열매 중 하나가 아버지의 기쁨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불쌍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의 삶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렴. 그래야 지치지 않고 오래, 꾸준히 갈 수 있단다. 아버지께서도 그것을 원하실 거라고 난 생각한다.”

그날 오후 교무실 내 책상 위에는 정규가 나에게 선물한 음료수가 놓여 있었고, 정규의 손에는 편지가 한 통 들려 있었다. 그것은 가난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들을 둔, 그래서 가장 큰 보석을 품고 살아가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담임교사의 편지였다. 

문경보|흔들리며 피는 꽃과 같은 아이들에게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대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그는 늘 아이들과 함께 할 무언가를 꿈꾸며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