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우리 권사님 소싯적에 1 l 젓가락이 포크를 만났을때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한미 FTA가 극적으로 타결됐다지요? 그래서 요즘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가 봐요. 돌이켜보니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에서 맺었던 조약은 기실 125년 전에 처음 있었어요. 큰 나라는 중국밖에 몰랐던 조선이 미국이란 서양나라와 처음으로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것이 1882년의 일이었지요. 그래서 한 때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부르짖었던 조선의 땅을 미국인들은 마음껏 활보할 수 있게 되었지요. 1884년일 거예요, 알렌이라는 의료선교사가 처음 들어왔던 때가…. 그 이후로 수많은 미국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발을 내딛게 됩니다.

그 분들은 한 손엔 성경을 들고, 마음에는 복음을 품고 이 땅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가지고 온 것이 하나가 더 있었는데, 바로 문화라는 옷을 입고 들어온 것이랍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구두를 신었고 양복을 입고 있었어요. 밥을 먹을 때에는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했지요. 그네들은 우리네 온돌방보다는 침대에서 자고 싶어했고, 신발 벗고 아랫목에 앉기보다는 신발을 신은 채 의자에 앉고 싶어했어요. 선교사들이 보기엔 우리가 우스꽝스러웠을 테고 우리가 보기에도 그 분들은 괴이했어요.

그네들은 미국에서부터 살아오던 생활양식을 웬만해선 바꾸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것이 편하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기독교 문화가 우리 조선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모양이었어요.

반면에 우리들은 자진해서 바꿔 나갔지요. 남자어른들이 갓을 벗고 상투를 자르고는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가르마를 탔댔어요. 또 미투리를 벗고 구두를 신었지요. 도포를 벗고 양복을 입었고요. 그들이 하는 대로 우리도 다 따라했답니다.

우리의 문화와 복음이 만나면서

우리를 바뀌게 한 힘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근대화, 문명화라고 부르는 문화의 힘이었을까?
저는 여적 이것이 궁금해죽겠어요.

미국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에는 미국문화라는 옷이 덧입혀져 있었던 것 같아요. 이를 간파한 눈 밝은 우리 어른들은 나름대로 복음 위에 우리의 옷을 입히려는 시도를 했답니다. 한국인들의 종교심은 정말 특심해요. 우리 스스로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라는 것을 자연스레 만들어냈지요. 기도를 하니까 마음이 뜨거워져서 이웃과 조선 땅을 섬기고 싶었지만 돈이 넉넉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시간을 드리기로 작정했지요. 편한 날 하루를 택해 쪽복음을 들고 나가 실컷 전도를 했어요. 이것을 우리는 날연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문화라는 옷을 입는 중에 웃지못할 일도 생겼어요. 많은 교회들이 ‘ㄱ’자 모양으로 지어졌거든요. 생각해봐요, 왜 그렇게 지었나. 옳지, 남녀칠세부동석이예요! 차마 우리 조선의 윤리를 무시할 수 없어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출입구로 들어와서는 따로 앉아 예배를 드렸다니까요, 글쎄. 목사님은 가운데 모서리에 서서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설교를 하셨더랬어요. 아마 무척 어지러우셨을거예요, 우리도 어지러웠으니까.

이렇게 미국선교사들과 처음 믿은 우리네 어른들이 옛날교회의 밑그림을 그렸던 거예요. 그런데 머지않아 큰 도전이 닥쳐왔어요. 1910년에 일본이 조선을 자기네와 한 나라라고 부르기 시작한 거지요.

김일석수색교회에서 고등부 아이들과 신나는 공동체를 모색 중이고 장신대 박사과정에서는 교회사를 공부하고 있다. 생긴 건 ‘컨템포러리’한데 왜 케케묵은 공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떡볶이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답하는 자못 의뭉스러운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