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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충돌론을 경계한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사태가 많은 희생자를 낸 가운데 아직 진정 되지 않고 있다. 세상을 불안케 하고 있는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물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를 지적하겠지만) 중동지역, 특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반복되고 있는 피의 악순환은 우리로 하여금 테러의 근절이란 무척 어려운 과제임을 깨닫게 하고 있다.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과 작은 진보가 곧 그보다 큰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은 세계인들에게 무력감마저 안겨주고 있다.

사실 팔레스타인 지역의 갈등과 미국과 아랍권 사이의 긴장관계는 오늘날의 정치적 경제적 역학관계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문제이해와 해결을 위하여서는 더욱 근원적인 관점으로부터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문명충돌론에 관심을 갖게 한 원인들중 하나가 된 듯 하다. 이것은 곧 오늘의 문제가 역사적인 갈등과 그로 인한 정치, 경제, 문화적 갈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충돌론이 관심을 끌게 된 주요한 배경중 하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미국 중심의 관점에서 중동문제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중동인들의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음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른바 헌팅톤 아류의 문명충돌론은 경계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오늘의 갈등은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의 충돌이며, 이슬람은 자유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자리잡는 데에 걸림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미국식 세계화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와 국방성에 대한 공격은 곧 이슬람의 미국식 세계화에 대한 반대이자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된다. 역으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은 기독교 문명의 이슬람 문명에 대한 공격이 되는 것이다. 만약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이러한 문명충돌론의 관점에서 오늘의 상황을 해석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폭력의 지속적인 악순환으로 인한 멸망만이 있게 될 뿐이다. 사실 이러한 형태의 문명충돌론은 그 관점이 너무도 서구 중심적이라는 것과, 지역과 문명을 도식화하고 있고 획일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론으로서도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서구를 기독교문명으로써 획일적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듯이, 아랍세계도 이슬람 문명이라는 하나의 틀로 규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헌팅톤 식의 문명충돌론을 경계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문명충돌론이라는 거대담론에 현혹되기 보다는 오늘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다. 그와 함께 미국과 이스라엘과 아랍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대한 객관적 정보와 지식을 확보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독특한 관계의 접점인 미국의 언론계와 재계를 주목하여야 한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결국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으며 심지어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도 재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환상과 막연한 짝사랑에 열중하여 고난 중에 있는 이웃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을 저버리고 있는 우리들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임성빈ㅣ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