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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모탕의 노래 4 l 어떤 사랑이야기

중학교 3학년 주성이가 이성 문제로 상담을 하고 싶다고 했다.

‘사랑의 열병’이 아닌 ‘금품 갈취’에 관한 내용이었다.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 매일 자기에게 와서 돈을 빼앗아 간다고 했다. 많은 액수도 아니고 하루에 꼭 100원씩 빼앗아 갔다고 했다. 물론 돈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아니고 꿔달라고 했단다. 얼굴이 ‘막’ 생긴 후배가 징그러운 미소를 지며 100원만 꿔달라고 할 때는 정말 소름이 쫙 끼쳐서 죽고 싶다고 했다.그러나 주성이가 그 여학생 후배에게 돈을 준 것은 후배의 외모가 역겨워서가 아니라 그 여학생이 중3 남학생 중 가장 힘이 센 친구와 사귀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자칫 여학생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힘 센 친구에게 맞는 것이 두려워 주성이는 울며 겨자먹기로 매일 100원씩 상납하고 있었다.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방법을 알려 주마.” 나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주성이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무척 잘 생겼어. 그러니까 여자후배들이 충분히 좋아할 거다 이 말이지. 그렇다면 중학교 1학년 여학생 중에 가장 힘세고 못 생긴 후배를 선택해서 사귀어라. 그 여학생과 깊이 사귀면서 동시에 너에게 매일같이 돈을 뜯어가는 그 여학생에게 변함없이 100원을 줘라. 그런 다음에 네가 사귀는 여학생에게 그 돈을 찾아오라고 시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겠니?”

심각한 표정을 짓던 주성이가 어이가 없어 픽! 하고 웃음을 날린다. 일단 1단계 작전은 성공이었다. 지나치게 굳어 있으면 주성이와 대화는 어려울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유치하기도 하고 실천하기는 조금 어려운 방법이겠지? 그렇다면 이 방법은 어떨까? 그 주먹 센 친구는 나도 잘 통하는 친구니까 내가 직접 너의 사정과 마음을 전달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을 해 줄까?”
“그건 싫어요. 이건 제 일이고 또… 선생님께 일렀다고 제가 더 얻어맞을지 몰라요.”
“그럼 이 두 가지 방법은 어때? 우선 그 여학생에게 다시는 돈을 줄 수 없다고 따끔하게 말하는 거야. 그게 싫다면 주먹이 센 그 친구에게 네가 직접 가서 네 사정과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면 어떨까?” 주성이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지면서 자신감 없는 표정이 되었다.
“겁이 나는구나. 친구 주먹이 무서워서.” 주성이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주성아. 선생님이 조금 어려운 질문을 할 것이니까 잘 생각해서 대답해 봐라. 너 오늘 선생님에게 상담을 하러 온 이유는 우선 매일 돈을 빼앗기는 것이 괴롭고, 두 번째, 후배, 그것도 여학생에게 돈을 빼앗기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맞니?” 주성이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런데 혹시 너 정말 나쁜 놈인 거 알고 있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결과를 미리 짐작하고 자신의 자존심을 돈까지 줘가면서 파는 바보라는 거 알고 있니?”  주성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렴. 넌 현재 후배 여학생에게도, 후배 여학생의 뒤에 있는 주먹이 센 친구에게도 한 마디 하지 않은 상황이야. 결과가 벌어지지 않은 상황이란 이야기지. 그런데 너는 아무에게도 아무런 말도 해보지 않고 그저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괴로워하고 있어. 후배 여학생도, 주먹이 센 친구도 아직 너의 진심을 듣지 못했고, 알지도 못하고 있는데, 넌 돈과 자존심을 스스로 그냥 내어주고 있어. 바보처럼. 너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구. 이 바보야!” 주성이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속이 타는 지 혀로 자꾸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음료수 한 잔을 마시게 하면서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진 뒤 나는 주성이에게 말했다.

“주성아! 이렇게 해결하자. 우선 네가 먼저 해결해봐라. 이것은 분명히 네 문제니까 말야. 그 아이들에게 직접, 솔직히, 그리고 부드럽게 이야기를 해 보아라. 물론 용기가 필요하겠지. 그래, 이번 기회에 용기가 무엇인지 배워보렴. 네가 용기를 내서 말을 하고, 협상안을 제시했는데 후배 여학생과 힘이 센 친구가 너의 말을 무시하고 너에게 폭력을 쓰려고 하면 그때는 선생님이 도와주마. 네 뒤에 내가 있으니까 용기를 내서 말을 해봐라. 난 그렇게 하는 것이 해결방법이라고 생각하고, 네가 그 방법을 선택했으면 좋겠다.” 긴 한숨을 내쉰 주성이는 나에게 인사를 하며 교무실을 나갔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주성이를 만나게 되었다. 주성이는 환한, 그러나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주성이의 이야기에 등장했던 주먹이 센 친구가 함께 서 있었다.
“선생님. 주성이 애인 생겼어요!” 주먹이 센 친구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했다. 약간은 어리둥절해진 나에게 주먹이 센 친구가 들려 준 이야기는 참으로 유쾌한 것이었다. 나와 상담을 마친 주성이는 밤새 잠을 못 자며 고민하다가 다음 날 주먹이 센 친구를 만났다. 주성이에게 이야기를 들은 주먹이 센 친구는 몹시 흥분하며 주성이와 함께 그 여학생이 있는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야! 너 이리 나와! 넌 위아래도 없냐! 어떻게 선배한테 삥을 뜯냐! 내가 여자한테는 주먹을 안 쓰는데, 너 나한테 오늘 좀 맞아야겠다. 그리고 뭐! 너랑 나랑 사귄다고!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찍찍하고 다녀! 나는 네 이름도 몰라! 뭐 이런 게 다 있어!” 1학년 여학생은 벌벌 떨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했다. “제가 왜 오빠하고 사귄다고 소문이 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요, 사실은 저 주성이 오빠 좋아해요. 우리 반 애들도 다 알아요. 그래서 주성이 오빠랑 사귀고 싶어서 말을 걸긴 걸어야겠는데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무조건 가서 100원만 꿔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주성이 오빠가 아무 말 없이 주더라구요. 그래서 매일 가서 돈을 달라고 했어요. 여기 제가 제일 아끼는 보석 상자에 주성이 오빠가 준 100원 짜리 동전을 담아 놓았어요. 주성이 오빠! 죄송해요. 그리고 이거 제 선물이니까 받아주세요.” 여학생은 보라색으로 된 종이보석상자를 주성이에게 살며시 내밀었고, 교실에서는 환호성과 박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다시 주성이와 마주 앉았다.

“선생님. 이제부터는 미리 걱정하고 겁먹지 않기로 했어요.”
“그래, 좋은 깨달음을 얻었구나. 미리 걱정하고 겁먹지 않는 거 그게 바로 용기란다.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스스로 패배자라고 인정해버리는 것만큼 바보는 없단다. 그런데 말이야. 선생님 궁금한 거 있는데 말이야. 그 여학생하고 사귀기로 했냐?”
“그게요, 선생님. 그냥 100원 줄 때가 훨씬 나은 거 같아요. 깡패였던 그 아이가 스토커로 변했어요. 정말 더 무섭다니까요!”
하지만 주성이는 전혀 무서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 표정과 웃음을 통해 이제 주성이는, 상황을 해결할 능력은 없어도 상황을 멀리서 바라보는 힘을 얻게 되었음을, 그래서 시간을 투자하며 고민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사나이로 커갈 수 있음을 스승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문경보|흔들리며 피는 꽃과 같은 아이들에게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대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그는 늘 아이들과 함께 할 무언가를 꿈꾸며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