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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TV 상자 펼치기

TV 상자 펼치기 1 | 유료방송의 거침없는 선정성

케이블TV, 위성방송 등 유료방송 시장이 선정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규제가 심한 지상파 방송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방대한(?) 표현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뉴미디어’이지만 요즘 나오는 내용을 보면 그 정도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매체면, 그만큼 새로워진 콘텐츠를 보여줘야 하는데 요즘 유료방송의 프로그램들은 온통 벗기고, 싸우고, 훔쳐보는 자극적인 화면과 일탈을 부추기는 비정상적인 대화들을 쏟아내고 있어 ‘올드 미디어’의 구태를 반복, 재생산해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유료방송의 특수성

물론 이미 현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여가 수단이 된 미디어가 반드시 문화적 엄숙주의를 지향할 필요는 없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에 필자도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바이다. 또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인간의 충동적 욕망을 흘려보낼 수 있는 ‘하수구’가 필요하다는 한 심리학자의 의견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이러한 주장이 선정적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유료방송 사업자의 주요 방어논리가 되고 있음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국내 유료방송 시장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본래 유료방송은 다양한 볼거리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대안적’ 혹은 ‘보완적’ 매체의 성격이 강하다. 특수성이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유료방송을 신청한 시청자는 자기가 낸 비용만큼의 효용을 기대하게 되고, 이는 너무나 당연한 자본주의적 논리로서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한편 공짜로 볼 수 있는 지상파 방송은 돈을 내지 않고도 TV 수상기만 있으면 누구나 시청이 가능하기 때문에 보편적 서비스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방송심의규정에는 지상파 방송과 유료방송에 대해 차별적인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진 않지만 실제 규제적용에 있어서는 유료방송에 대해 관행적으로 보다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유료방송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보편적 매체로서의 책임 가져야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지형적 특성상 난시청 지역이 많아서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 위성과 같은 대체적 경로를 통해 TV를 시청하는 인구가 적지 않다. 물론 이는 모두 유료 형태의 서비스다. 특히 아파트와 같이 복합주거지역이 우리나라 주택의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일찍이 공청망을 장악한 케이블TV 업계의 적극적인 프로모션에 의해 국내 케이블TV 가입자는 국내 전체 TV시청가구 중 약 80%인 1,400만 가구에 달할 정도로 많다(2006년 4월 현재). 바로 이 지점에 우리나라 방송 시장의 특이성이 위치한다. 즉 더 이상 유료방송 시장은 앞서 언급한 ‘대안적’, ‘보완적’ 매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지상파 방송에 버금가는 보편적 서비스가 되었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유료방송 사업자들이 주장하는 특수성 논리는 상당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특히 케이블TV의 경우, 기본형 가입자가 많아서 별도의 컨버터를 부착하지 않고 공청 안테나에 연결하여 시청하는 가구가 대부분이다. 특히 한 개의 리모컨으로 지상파/케이블의 모든 채널에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두 서비스가 서로 다른 매체라고 보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도 규제기관이 유료방송에 여전히 더 큰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대단한 ‘특혜’가 아닐 수 없다.

유료방송이 기존 지상파 방송이 가지고 있는 주파수의 수적(數的) 한계를 극복하고, 방송을 일방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단방향 방송을 넘어 시청자와 매체가 상호작용(interaction)할 수 있는 쌍방향적 환경을 제공하여 시청자 복지 측면에 기여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잘못된 프로그램 편성 관행이 모두 덮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료방송이 문화적 다양성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자 연예인들이 ‘남자사용설명서’를 만들어 공개하고, 브래지어 벗기는 법을 세세하게 가르치는 것이 과연 방송에 적합한 내용인지 제작진들은 깊게 고민해봐야 한다. 방송사는 분명 기업이지만 방송 프로그램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선 안 된다.

박웅진|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선임연구원과 문화선교연구원 전문위원,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미디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데 많은 관심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