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습작|김탁환
김탁환의 <천년습작>을 읽으면서 지금의 내 글쓰기를 본다. 십 몇 년 전의 글쓰기와 지금의 내 글쓰기는 어떻게 다른가? 왜 지금까지 난 뭘 쓰겠다고 깨작대고 있을까? 그건 순전히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매혹아래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일’, 이건 불안을 동반한다. ‘자신의 욕망에 필적할 만큼 제대로 된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불안. 노트북을 켜놓고 멍하니 있는 시간은 항상 끔찍했다. 제대로 된 글 한편 써보지 못한 나도 그런데,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 말하는 그 불안은 날 더 마비시킨다. “자기의 모든 시간을 바친다 하더라도, 모든 시간을 다 바친다 해도 그것은 충분치 않다”니. “글을 읽는 눈은 높아졌는데 손은 여전히 무뎠”다는 저자의 문학청년 시절이야기에 너무나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하고 싶은 일은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쓰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곱씹힌다. 많이 읽으면 당연히 잘 쓰게 되리라고 손쉽게 판단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공감에 뭔가 뾰족한 수를 줄 줄 알았다. 글쓰기를 ‘공중부양’시켜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예수님 말씀과 같다. 매주 6일 동안 점차 까먹고 하루에 걸쳐 회복하는 그런 말들. 다이어리에 적혀 있지만 찾지는 않는 그런 기록. “발바닥에 의존하여 뒤지고, 기억에 의존하여 돌아보라.” 이 말을 들으면서도 일단 노트북을 켜놓고 그때서야 고민한다. 나를 중심으로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면서 상대를 이해하는 일. 보편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개별적으로 파악하는 일. 난 내가 바라본 대상에 대한 관점이 우선이었다. 이래서 엉망이구나. “어떤 친구도, 어떤 지상의 인간도 그의 책상만큼 그를 많이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 노트북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것으로 생색을 내볼까 하는 마음이 우스워진다. 그 시간에 한 문장이라도 더 가다듬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작품은 손으로 쓰는” 거니까. “문장 하나하나를 내가 왜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해야 할 일들이 떠 오른다. “정신과 육체가 집중되어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라는 자세가 나올까?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놓지 못하고 너무나 불안해서 떤다.
글 양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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