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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너 심장이 뛰고 있니?

그림 현

그 친구와 그렇게 깊은 만남을 갖게 된 날은 겨울이 깊어질 무렵, 어느 날 늦은 오후였다. 학교 운동장에서였다. 칼바람이 너무
시려서 종종 걸음을 하며 퇴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축구공이 날아와서 내 머리를 때렸다. 내가 머리를 만지고 있을 때 학생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을 때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그 친구의 얼굴을 보았고, 내 머릿속에는 방금 전까지 혼자 벽을 향해 공을 차던 그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운동장 구석에 있는 우리는 앉았다.
“선생님. 제가 잘하는 게 있을까요?”
“너 유리창 잘 닦잖아. 특별구역 청소할 때 네가 유리창 닦으면 정말 우리 모두 놀랐잖아.”
“그러네요. 제가 그래도 잘하는 게 있긴 있네요. 맞아요. 유리창 닦을 땐 행복했어요. 선생님께 칭찬받고, 친구들이 인정해주는 것도 기분 좋았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 칭찬 때문에 유리창을 닦은 건 아니구요. 유리창 닦고 있으면 마음이 제 마음이 그냥 편안해져서 열심히 닦았어요. 그렇지만 선생님…. 유리창 잘 닦는다고 대학에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선생님. 제가 대학에 갈 수 있을까요?”
“몰라. 난 네 담임선생님도 아니고, 또 너랑 수업을 함께 한 일도 없어. 다만 나는 특별구역을 청소하는 학생들을 관리하는 선생님으로 너랑 만났을 뿐이잖아.”
“그렇죠? 선생님도 잘 모르시겠죠? 저도 잘 모르겠는데, 저에 대해 잘 모르시는 선생님께서도 잘 모르시는 게 맞을 거예요. 죄송해요.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해서….”
“죄송하기는 뭐가 죄송해. 네 일 생각하기도 힘들 텐데 왜 선생님 감정까지 신경 쓰고 있냐. 바보 같은 놈! 음, 그런데 말이야. 선생님이 지금까지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너는 충분히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유리창을 닦을 때 너를 생각해보니까 너는 네가 즐거운 일이라면 싶은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 줄 아는 친구인 것 같고, 지금 이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면서 네 삶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까 음, 그래 그 정도면 대학생이 될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이든다. 그런데 말이야. 너, 다른 사람을 너무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방금 선생님에게 죄송하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야. 혹시 말이야. 너는 네가 가고 싶은 대학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좋은 대학이라고 말하는 그 대학에 가고 싶은데 네 성적은 그렇지 못해 괴로운 것은 아니니?”
“…….”
“아니면 말이야. 혹시 네가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그곳을 포기하는, 그러니까 정말 멍청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 그런 생각 때문에 더 마음이 힘든 건 아니니? 있잖아. 선생님은 무엇보다 네가 너 자신에게 솔직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봤으면 좋겠다.
너 자신과 대화를 많이 하면 그 누구의 칭찬이 아니라 네가 좋아서 유리창을 닦았는데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이 된 것과 같은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자꾸 다른 사람의 시선에 너무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 일에 평생을 바칠 수 있다면 굶어 죽어도 좋은 일이 무엇일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렴. 그럼 네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 선생님, 왜 벌써 가세요?”
“이젠 네가 너랑 데이트를 하는 시간 만들어봐. 중매쟁이는 말이야, 적당할 때 빠져나가는 게 예의야. 내가 시간을 빼앗으면 실례지. 그럼 둘이 잘해보렴!”
나는 친구의 어깨를 두들겨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문을 나서는 내 뒤에서 벽을 향해 공을 차다가 울부짖는 친구의 울음을 들었다. 어금니를 악물었지만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시간이 흘러 졸업식 날이 되었다. 그 친구는 교무실로 찾아와서 나와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였다. 한껏 폼을 잡으며 사진을 찍고 나서 그 친구가 말했다.
“선생님. 저 무용학과에 입학했어요. 썩 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제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했어요. 그리고 입학 장학금도 받았어요.”
“그래! 축하한다. 어디 좀 보자. 그래 심장이 뛰는구나! 정말 축하한다. 그런데 말이야. 좋은 대학이란 말이야. 너를 행복하게 해 주는 대학이 좋은 대학이야. 그러니까 넌 적어도 너에게 있어선 대한민국 최고의 좋은 대학에 입학한 거야. 그것도 장학생으로 말야. 그리고 임마. 진짜 게임은 지금부터야. 지금부터 스무 살 세상하고 제대로 한 번 맞짱을 떠보렴. 나는 네가 이기는 쪽에 올인할게. 내가 건 판돈 다 잃어도 난 상관없다. 한 판 잘 놀았다고 생각하면 되고, 게임이 끝나도 너는 내 옆에 있을 거잖아! 내가 네 옆에 언제나 응원하면서 있을 것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일단 시작된 게임이니까 이겨야지. 이 세상과 한 번 신명나게 싸워보자고! 그리고 싸움 끝났을 때 한 판 잘 놀았다고 세상과 얼싸안고 껄껄 웃는 네 모습도 보고 싶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바로 교사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거든. 친구야. 선생님 가슴을 뛰게 해 줘서 고맙다. 정말 고맙다.”

문경보|현재 대광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국어를 매개체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을 나누는 사십대 중반의 교사. 학생들에게서 느끼는 매력과, 그들의 눈빛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 때문에 늘 학교 탈출을 꿈꾸다가 번번이 포기하는 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위해 학교를 벗어날 꿈을 늘 계획하는 이중적인 사람. 지금까지 만난 세상과 새롭게 만나기를 오늘도 기도하고 글 쓰고 수다를 떨면서 나날을 엮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