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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책 읽는 마음

기도의 딜레마와 다시 ‘묻기’

하나님은 뻔뻔한 기도에 응답하신다
마크 헤링쇼, 제니퍼 슈츠먼|살림출판사


영화 <밀양>을 보는 크리스천들의 마음은 불편하다. 아들을 죽인 사형수의 기도와, 아들을 죽인 사형수 때문에 고민하는 엄마의 기도. 엄마의 용서 이전에 사형수는 이미 ‘구원’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사형수의 ‘기도’는 이루어졌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것일까? 미어지는 엄마의 절규에 불편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이건 뭔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어렵다면, 그 순간 신의 관점은 무엇인 걸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모순에 직면한다.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수준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분명 간절히 기도했다(하지만간절함의 기준은 ‘내’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기도에 응답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의 조급함일까 아니면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일까? 아니면 그 너머에 뭔가가 있는 것일까? 어느 날 다가온 기도에 대한 응답은 신앙을 더욱더 공고히 만들고 그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지만 곧 이어 그는 응답의 성취 때문에 기도를 내려놓을 수 있다. 인간은 곧 망각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그러면 그 ‘성취된’ 기도를 통해 생성된 그의‘ 기도’의 태만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성취를 다음 단계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시험’ 이전의 미끼이고, 그는 ‘시험 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그의 성취 후 ‘교만함’에 대해 지적할 수 있을까?
또 하나만 더 들어보자. 이것은 좀 개인을 넘어선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 해하기를 원하는 기도가 있다. 세상에 ‘실재’하지 않았던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를 근거로 ‘성스러운 전쟁’을 바라는 부시의 기도가 그렇다. 그의 기도의 ‘응답’은 수십만의 목숨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고, 여전히 그 분진들은 많은 아이들과 여성들을 잠 못 이루게 만들어 죽음을 삶보다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 때 우리는 그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라크 민중과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Neocons: Neo-Conservatives의 줄임말- 번역하자면 신보수주의자)중 누구의 편에 서야 하나, 아니면 그것을 통해 더 ‘넓은’ 뜻을 계획하신 신의 의지의 편에 서야 하나? 딜레마는 끊이지 않는다.

마크 헤링쇼와 제니퍼 슈츠먼의 <하나님은 뻔뻔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어찌 보면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의 주위에서 크리스천으로 사는 일의 팍팍함을 예시들을 통해 잘 보여준다. 매 순간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간구해야 하는데, 그 때 ‘크리스천’으로서 정답은 무엇일까? 오히려 답 그 자체보다 그것을 향해 실천하면서 계속 스스로 묻고 또 하나님에게 묻는 것! 그게 중요한 기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아닐까. 
양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