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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오늘>/문화선교연구원

영화 <파괴된 사나이>|기억하고 있었나요?


영화 <파괴된 사나이>
감독 : 우민호
주연 : 김명민, 엄기준, 박주미

과거 유현목 감독이 <순교자>에서 전쟁 상황 속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설명하는 기계적인 일을 반복하기보다 오히려 실천적인 삶을 중시하는 한 목사의 입에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발언을 하게 함으로 교계는 들썩거렸고, 유현목 감독은 이단아 내지는 사탄 취급을 받은 적이 있었다. <파괴된 사나이>의 예고편을 보면서 <순교자>와 더불어 일어난 당시의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사태의 추이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필모그래피를 통해 우민호 감독은 제1회 서울기독영화제에서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로 단편경쟁부문에서 갓피상을 수상했던 경력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천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가 일을 저지른 것이다. 대중문화의 상업성에 편승해 자극적인 이미지만을 소비한 것일 뿐인가? 아니면 반기독교적인 영화인가? 아니면 상업영화 형식을 통해 기독교 주제를 심도있게 고민한 결과인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여러 생각들을 하게 만든 영화다.

반 기독교 영화?
뚜껑을 들여다 본 필자는 한 마디로 말해서 목사가 한없는 나락으로 내팽겨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목사로서 진지하게 위기에 대처하는 고민도 찾아볼 수도 없고, 전직 목사라고 할 만한 경건성에 대한 흔적도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목사는 하루아침에 세속적인 삶을 살아간다. 크리스천으로서 서울기독영화제에 작품을 제출했을 정도라면 영화의 내용으로 인해 일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반발을 전혀 예상하지 못할 사람은 전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매우 도발적이고 또 충격적이다. 도발적이라 하면 딸이 유괴되어 생사조차도 알 수 없는, 아니 오히려 죽었다는 생각을 강하게 만드는 위기적인 상황에서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수직적으로 추락하는 목사의 모습 때문인 것이고, 충격적이라 함은 그런 목사의 모습을 통해서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경우에서와 같이 <파괴된 사나이>는 실제를 비틀어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의미경험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영상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만든 영화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표면적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목사의 갑작스런 변신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이로 인해 영화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파괴된 목사의 이미지들은 영화의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가공된 소재일 뿐이며, 현실의 목사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 교회 이미지가 많은 영화이지만 결코 부정적이지도 않다. 이글은 이것을 밝힐 필요성을 강하게 느껴 쓰게 된 것이다.
감독의 의도를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역설적으로 다소 길다고 여겨지지만, 오히려 더 풍성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우회적인 길을 걸어보겠다. 성경 욥기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특히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 같다. ‘만일 이런 일이 내게 닥치면 나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소유로 일컬어질 만한 것들은 모두 잃은 상황에서 그가 던진 신앙고백은 아마도 전무후무한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내가 적신으로 왔으니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께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지라”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의 삶이, 비록 그가 아무리 인간으로서 당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욥의 고백과 삶 역시 오늘 우리들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재현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가능성을 전제했다기보다는 하나의 이상적인 유형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부담감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예수의 삶, 종말의식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이 고안해낸 방법은 여러 가지다. 예수님의 삶의 경우, 우리가 잘 아는 아프리카 성자 슈바이처 박사는 유일한 가능성을 예수님의 종말의식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면서 그는 종말이 곧 오게 될 것이라는 강한 종말의식이 있었고, 이것이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삶으로 본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그런 삶을 살고 또 산상수훈과 같은 그런 말씀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존론적 해석을 시도했던 불트만 같은 신학자는 당시의 신화적인 사고가 삽입된 것으로 보고 소위 성경의 ‘탈신화화’ 작업을 통해서 현재의 재현 가능성을 시도했다. 욥의 경우에 사람들은 대개 욥의 상황을 현실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스토리텔링의 구조 안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부담감의 문제를 해결한다. 쉽게 말해서 욥의 변치 않는 신앙은, 하나님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평가하신 충분한 이유가 되며, 또한 그가 왜 하나님의 자랑이 될 수 있었는지를 확인해주는 기능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적인 인간을 염두에 둔 상황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랑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인가, 어떤 상황을 예상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구조적 장치라는 것이다. 이런 해석들은 성경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또 삶의 지혜를 발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태도다. 이런 해석에서 문제가 있다면, 성도들을 고난의 삶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한 가운데에서 오직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태도를 낳을 뿐이라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고난의 상황은 피하되, 불가피할 경우는 의미를 찾아라!

인내의 경주에 이르지 못했을 때
예수님과 욥의 삶을 대하면서 제기되는 또 다른 질문은, 만일 두 사람의 삶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재현하지 못한다면, 즉 고난의 순간에 끝까지 신앙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런 나의 삶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끝까지 지킬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주로 신앙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에 비해 신앙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던 사람과 신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이 신앙을 받아들인 사례도 전해주고 있어서 이런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해결을 위한 도움을 어느 정도 기대하도록 한다. 다윗과 베드로가 대표적이요, 사도 바울은 비록 신앙의 굴곡은 아니라도 그리스도와 멀리 있었던 때가 있었다. 비유적인 관점에서는 탕자이야기가 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로 표현하고, 사울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의 변화를 통해서 차별화했으며, 또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다. 탕자 이야기는 집을 나선 아들이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야기를 말하면서도 탕자로서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사실 가장 긴 이야기가 담겨져야 할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생략되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유형들이 그 안에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뛰어난 문학적인 상상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주목할 일은 그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계기다. 즉, 고통으로 가득한 삶의 한 가운데서 그는 하늘을 보았고, 아버지와 그의 집의 풍성함을 기억해 낸다. 이로 인해 그는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갈 힘을 얻게 되고, 그는 아버지의 넓은 사랑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된다. 집을 나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시간에 대해 성경은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잃어버렸던 아들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고,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다

성경은 어쩌면 우리의 현실과 그렇게 멀리 있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이나 욥과 같은 사람들보다 더 많이 제시해주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가 복음의 본질을 상실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질문에 직면한 인간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만 인도하려는 데에 있다. 이런 일에 있어서 중세 말의 교회는 대표적이었다.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그런 그들 앞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교회가 되었다. 성도들이 처한 극단적인 상황에서 구원을 제시하는 교회 이미지를 제시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면죄부의 등장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다행히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의 칭의론의 등장으로 교회는 이런 왜곡과 변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교회의 역할을 강조할 때 신앙의 성숙과 물질적인 헌신의 정도를 비례관계로 보게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제기한 질문을 다소 다르게 표현한다면, 만일 내가 불행한 사건의 한 중심에서 신앙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며, 또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신앙생활에서 굴곡을 경험한 사람들, 특히 큰 시험을 거쳐서 주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 그랬을까? 나의 과거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 부재의 삶
영화 <파괴된 사나이>는 유괴된 딸을 두고 전개되는 아버지의 처절한 사투를 그려 내고 있지만, 사실은 바로 위의 질문에 대한 세 가지 대답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첫째는 파괴된 삶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믿음을 잃어버린 삶이었다는 것이고, 마지막 셋째는 기억하지 못한 삶, 곧 소망을 잃었던 삶이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감상하면서 주의해야 할 점은 목사직을 버리고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것 자체를 하나의 파괴된 존재의 형태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은 모두 파괴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파괴된 사나이’는 그가 더 이상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동 유괴라는 사건이 한 가정과 한 인간에게 어느 정도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사회성이 매우 강한 영화다. 5살 때 유괴되어 8년이 지났음에 불구하고 딸이 살아있다고 믿으며 매일 시내를 돌며 전하는 전단에 대해 보이는 사람들의 무관심한 태도나 사건의 수사에 지쳐 있는 경찰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치부를 다시 한 번 폭로한다.
목사직을 포기하고, 또 딸의 생존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은 채 세상 속의 한 사람으로서 회사를 운영하는 남편을 향해 아내는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남편은 오히려 그녀의 행위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비난한다.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경험을 두고 남편과 아내의 반응이 전혀 달리 나타난 것이다. 사실 영화는 두 사람의 태도에서 누가 더 옳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결국 아내의 믿음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그것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지 않다. 만일 그랬다면 아마도 종교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감독에게 보다 더 중요한 측면은 딸의 유괴로 인해 목사였던 주명수가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딸의 생존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것과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마지막 장면에서 종합된다. 종교영화가 아니면서도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잘 성찰한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기억되지 않는 삶
목사 이후의 주영수의 삶을 종합적으로 점검해보게 해주는 장면은 마지막이다. 어렵게 찾은 딸 혜린은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를 받는 중이고, 주영수는 수감 중이다. 담당 경찰과 함께 면회를 온 혜린은 그 동안 자신을 찾았던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묻는다. “잃어버린 후 나를 지금까지 나를 계속 기억하고 있었나요?” 사실 8년 동안 세상과 단절하며 갇혀 지내야 했던 혜린이로서는 오랫동안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던 부모들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혜린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우리는 혜린이가 오랜 상처로부터 회복되고 있는 중임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의 포인트는 혜린의 질문을 듣는 주영수의 분명하지 않은 얼굴표정에 있었다. 딸의 질문에 대해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뇌리에는 유괴 후에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과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바로 그 시간들을 ‘딸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시간’으로 부각시킨 것이며, 이것은 곧 아내가 지적했던 ‘믿음을 잃고 살았던 시간들’과 일치한다. 딸에 대한 기억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아내의 말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믿음에 대한 기억이었다. 주영수가 잃어버렸던 것은 사실 딸만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기억이었다. 딸의 질문은 단지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종교성을 두고 많은 질문들이 오가게 만든 마지막 장면은 영화가 결코 반기독교적이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 메시지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의 타락은 예수 그리스도가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삶이다. 기억되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거침없이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뿐임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붙잡히시던 날 밤에 스승과의 관계를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며,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 수많은 부침을 경험했던 것은 사사기에 따르면 여호와의 말씀과 그분의 행위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은 한 마디의 전화통화였고, 끝없이 계속되는 고통의 순간이었으며,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이고, 그리고 닭이 세 차례 울어댈 때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행위들을 기억하는 삶이다. 망각의 순간을 틈타 사단의 세력이 틈타 유혹 아래 놓이게 되고, 결국 착각의 과정을 거쳐 죄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죄의 파괴력이 얼마나 강한가!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행위를 기억하며 거듭 반추하며 사는 삶이 제자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