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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첫눈처럼 우리 함께 있음에

그림 현


지나간 겨울, 가슴 속까지 시원해졌던 그 날의 이야기 한 토막을 꺼내본다.
대학교에 지원을 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두 명의 제자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선생님이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전에 너희들 둘 다 똑같이 오른쪽 눈에 멍든 때 있었잖아. 왜 내가 너희들 싸우는 것 보고 말렸던 그때 말이야. 내가 싸움 말릴 때는 서로 죽일 것처럼 날뛰더니 그다음 날부터 동성 연애한다고 친구들이 놀릴 정도로 늘 함께 다녔잖아.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냐?”
영민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것 때문에 제가 너무 힘들어서 선생님께 상담을 하다가 중간에 일어나서 상담실에서 뛰쳐나온 그날 말씀하시는 거 맞죠?”

그랬다. 그날 영민이는 상담실 문을 거칠게 열고 튀어나갔다. 작년 여름에 영민이의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영민이는 슬프고 화도 났지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짐을 싸서 나가 버린 집에서 영민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떠나간 어머니도 밉고 어머니를 나가게 만든 아버지도 싫었지만 열 살 차이가 나는 어린 남동생이 너무 불쌍했다. 그래서 남동생 앞에서 슬픈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래서 고 3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동생을 정성껏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집에서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 와서도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이 자신의 가정 상황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더 명랑하고 활발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영민이는 열아홉이었고, 고 3이었고, 결정적으로 성격이 너무 여렸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말과 행동을 ‘오버’하게 되었다. 그런 영민이를 보고 단짝인 마루가 거친 소리로 충고를 하다가 둘 사이에 싸움이 크게 벌어진 것이었다. 상담을 받던 도중에 일어서버린영민이가 걱정되어 내가 교실에 들어섰을 때, 바로 그때 마루와 영민이는 싸우고 있었다. 둘 다 얼굴은 코피로 범벅이 되었고 영민이는 큰 소리로 교실 바닥을 뒹굴며 울고 있었다.

“영민이가 그다음 날에 저보고 부모님이 이혼하셨다고 말했어요. 저는 정말 미안했어요. 절친이라는 놈이 친구 마음도 몰라주고 충고를 한답시고 더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했어요.”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마루가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더 좋았어요. 저는 그때 누군가에게 실컷 얻어맞거나 아무라도 실컷 두들겨 패주고 싶었거든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마침 마루가 제게 싸움을 걸어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더 친해졌구나. 그럼 마루야, 앞으로 영민이랑 자주 싸워야겠다?”
마루도 씩 웃으며 대답했다.
“싸울 일이 있으면 싸워야죠. 그런데요, 선생님. 이젠 싸워도 영민이와 제 사이가 깨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영민이 덕분에 저는 싸워도 사람 사이가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거든요. 그리고 싸움도 해보니 꽤 재미있더라고요. 헤헤.”
“하하. 영민이. 너 좋겠다. 마음 놓고 재미있게 싸울 친구 있어서….”
영민이는 배시시 웃더니 다시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선생님, 전 다시 마루랑 싸움하지 않을 거에요. 저 자식 주먹이 얼마나 센데요. 다시 맞을 생각을 하면 끔찍해요.”
“선생님, 이 자식 순 뻥 치는 거예요. 얘 주먹이 저보다 더 세요. 그때 싸울 때 제가 다섯 대 정도 때릴 때 영민이는 겨우 한 대 정도 저를 때렸거든요. 근데 코피 나고 멍든 것은 똑같다니까요. 거기다 맷집은 얼마나 좋은 줄 아세요. 그렇게 맞고도 쓰러지질 않더라니까요. 이 자식 정말 맷집 죽여줘요. 웬만큼 맞아도 끄떡없을 걸요. 헤헤.”
“그래, 영민이 맷집 좋은 건 내가 잘 안다. 그러니까 그 힘든 상황을 저렇게 잘 견디어 냈잖니.”

나의 말을 듣고 웃음을 머금고 있던 영민이의 눈에 조금씩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야 지난 가을에 나에게 상담을 하러 왔던 영민이의 아픔이 치유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영민이의 가정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집안일로 가슴 답답할 때 만나서 풀어낼 친구 마루, 싸움마저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우정을 간직하는 법을 배운 마루가 곁에 있어서 영민이가 걸어가게 될 스무 살 이후의 세상은 꽤 따스할 것이라는 믿음이 나의 마음속에 첫눈처럼 내려앉았다.

그날 나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나는 함석헌 선생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중에 한 부분을 노래하고 싶어졌다. 아니 신나게 노래했던 날이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오늘 정말 기분 째지게 좋은 날이다. 내가 ‘해결사’나 ‘메시아’의 역할을 하는 스승은 아니더라도 ‘그 사람’끼리 만나는 길에 서 있는 구경꾼이 된 것만으로도 나는 참 행복하다. 스승의 자리에서 맛보는 큰 기쁨 중 하나는 제자들끼리 세상을 살아갈 때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형제의 우애를 늘 기도하는 부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영민아, 마루야 고맙다. 세상을 함께 걸어가는 좋은 친구가 되어줘서! 그리고 야! 문경보! 제자들을 마음으로 품어주고 그들의 마음을 다독거려줄 줄 알아주는 너도 참 멋진 친구다.

문경보|현재 대광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국어를 매개체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을 나누는 사십대 중반의 교사. 학생들에게서 느끼는 매력과 그들의 눈빛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 때문에 늘 학교 탈출을 꿈꾸다가 번번이 포기하는 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위해 학교를 벗어날 꿈을 늘 계획하는 이중적인 사람. 지금까지 만난 세상과 새롭게 만나기를 오늘도 기도하고 글 쓰고 수다를 떨면서 나날을 엮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