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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사람과 사람

물때를 읽는 이야기꾼 l 만화가 박흥용

최근 영화계는 만화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강우석 감독의 <이끼> 등이 만화를 원작으로 삼았으며,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 <설국열차>도 동명의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준비 중이다.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만화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이야기 창고와 같다. 이준익 감독이 영화화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원작자 박흥용 화백. 30년간 쌓아온그의 만화들은 요즘 충무로에서 섭외 0순위라고 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이야기꾼이자 30년간 만화에만 매진해온 작가주의 만화가, 박흥용 화백을 만났다. 글 이재윤 | 사진 김준영

빵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박흥용 화백을 소개할 때면 항상 작가주의 만화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20대 어느 날 친구들과 여행을 계획하고 떠나려던 중 노먼 록웰의 그림을 보았다. 그 순간 일정을 취소하고 그 자리에서 그림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노먼 록웰 때문에 20대 초반 7년을 정신없이 보냈다. 드라마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책을 탐독했다. 니코스 카잔스키,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문학작품에 심취하였고 불교 및 각종 사상서를 깊이 연구했다. 진정한 이야기꾼이 되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작가주의 색채가 깊이 묻어 나오는 박흥용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대한민국 만화문화대상 저작상을 수상하고, 2005 푸랑크푸르트 북페어가 한국의 책100으로 선정했던 한국 만화계의 고전이다. 이야기 전개와 그림체, 대사가 가장 한국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요즘에는 해외에서 제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요. 프랑스의 한 출판사에서 아시아 만화 컬렉션을 기획했는데 한국 작품으로 저에게 의뢰가 들어왔죠. 요즘은 그 작업을 하느라 국내에 작품 발표를 못해서 사람들이 궁금해 하더라고요. 외국에 한국의 작품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다시 국내 활동에 힘써보려 합니다.” 박흥용 화백의 한국 만화에 대한 애정을 특별하다. 만화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많은 선배, 동료 만화가들이 만화의 길을 포기하기도 했다. “이미 일본 만화가 자리를 차지해 버렸어요. 한 때 정부정책의 혼선으로 생긴 공백에 일본 만화가 무분별하게 치고 들어 온 거죠. 한국 만화에 대한 애정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특히 창작 만화가 더 많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해요. 원 소스 멀티유스 시대에 만화는 모든 문화산업의 뿌리라 할 수 있죠. 정부에서도 최근 이 부분을 인식하고 만화계에 대한 지원을 하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쉽지는 않은 상황입니다.” 데뷔 초창기에는 그도 만화가로서 정체성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서는 출판사의 기준에 맞추어 상업적인 작품도 그려야만 했다. “어느 순간에 보니 ‘빵을 그리고’ 있더군요. 그래서 기도 했어요. 빵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만화를 그릴 수 있게 해주십사.” 만화 창작이라는 기쁨은 그에게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빵에 대한 치열한고민 없이는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없다고도 말한다. 경제적인 부분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에게 있어 끝없는 화두이다. “만화가 지망생들을 만나 보니 빵을 그릴 능력도 없고 그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없으면서 빵에 대해 무시하는 모습들이 있더군요. 빵을 그려봐야 빵이 무엇인지도 알고 그 빵을 피해갈 수도 있는 법이죠.”


나의 로마는 어디입니까
박흥용 화백은 만화를 그리다가 소위 말하는 ‘예수쟁이’가 되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만화가로서 소재를 찾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20대 후반이었죠. 작품의 구조를 입체적으로탄탄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책들을 보면서 공부했어요. 그런데 서양의 모든 사상이 성경이라는 큰 뿌리에서 나온 것을 알게 되었고 그저 공부를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6~7독 쯤 했을 때 놀라운 개인적 체험이 있었죠.” 회심의 체험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 쌓여 갔고 동시에 신비적인 체험도 있었다고 말한다. “누가 들으면 신비주의자라고 웃을지 모르겠어요. 어느 겨울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해보게 되었어요. 아직 교회에 다니지 않을 때죠. 그날 밤 기도 중에 주님의 은혜를 체험했어요.”그 이후로 점점 더 성경에 빠져 들어가면서 그의 신앙도 깊어졌다. 만나는 만화계 선후배들마다 전도를 하면서 박흥용이 예수쟁이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의 만화만큼은 ‘세상’으로 더욱 나아가도록 힘썼다. 그의 만화에는 기독교적 메시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이 읽을 수 있는 기독교문화가 반드시 필요해요.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모두 읽고 공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기독교문화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점점 더 성벽을 쌓아 게토Ghetto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 서점에 있는 기독교 서적들은 너무 ‘교회적’ 이에요. 오히려 성경은 세속적이죠. 우리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너무 아름답게만 포장하고 교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좋지 않아요.”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바울과 같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했다. “사도바울은 헬레니즘문화에 익숙한 로마 시민이었죠. 그는 로마 시민권이 있었기에 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어요. 결국에는 최종 목적지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잖아요. 저는 주님께 ‘나의 로마는 어디입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리고는 나에게 로마 시민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만화계에서 정말 실력으로 인정받는 일. 그것이 나에게는 로마 시민권이었죠.”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02)

내 파란 세이버 (2001)



 

 

 

 

 

 

 



독자들의 상처를 보듬으면
그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에요

이제는 박흥용 화백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꽤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온다. “저는 문하생을 두지도 않고 저희 집도 넓은 편이 아니라서 찾아오는 후배들을 위해 교회에서 모이고 있어요. 만화이야기, 인생 이야기를 나누죠. 그러면서 신앙을 갖게 된 친구들도 있고요. 저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면 무조건 성경을 읽으라고 해요. 거기에 모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기자들이 저에게 만화 소재는 어떻게 구하냐고 물으면 그냥 성경만 읽는다고 대답해요. 실제로 그렇죠.” 이제는 그 모임을 거쳐 간 숫자도 꽤 된다. 이들이 좋은 만화를 만들어 낸다면 한국의 문화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박흥용의 만화에는 유독 작은 자, 약한 자에 대한 관심이 많이 드러난다. 이러한 메시지가 한국 사회에 주는 의미는 특별하다“. 제가 힘든 생활환경에서 커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교회가 너무 강한 자만 원한다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만 요구하면 안 되겠죠. 독자들의 상처를 보듬으면 그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에요.” 만화를 통해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는 진지한 태도가 사뭇 강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아마추어 무선기사들이 발견한 SSB(Single Side band)파가 있어요. 작은 에너지로 멀리까지 전파를 보내려고 열심히 연구하다보니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멀리까지도 전달되는 SSB파 같은 이야기. 그런 만화를 만들어야겠지요.”

박흥용 화백은 길음성결교회(임명빈 목사 시무)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다. 같은 교회 교인이 운영하는작고 예쁜 카페에서 이루어지는 인터뷰 내내 푸근한 그의 인상은 이웃집 아저씨의 따뜻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날선 검과 같은 장인정신은 어떤 사상가도 감히 맞서기 힘든 강인함을 지녔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영화 빠삐용 이야기를 꺼냈다. “빠삐용은 바다를 통해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간수는 알지 못하는 물때를 기다리죠. 그에게는 너무나 간절한 필요가 있었기에 다른 누구도 보지 못하는 그 물때를 보는 눈을 지니게 된 거죠. 만화가를 포함한 작가는 바로 물때를 읽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진짜 필요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찾아서 물때를 읽어내는 것이 바로 작가의 역할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 그리고 한국 교회에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모두 상대방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외면하고 나에게 필요한 이야기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계를 넘는 소통의 가치가 절실한 요즈음, 물때를 읽는 마음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