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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아름다운 당신의 오늘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스스로를 구하는 것 l 김진혁 프로듀서

『텔레비전 화면 위로 문장 하나가 나타난다. 찰나의 순간, 마음에 와서 쿵 박힌다. 머릿속 정답처럼 박혀있던 생각이 조각난다. 선명한 진실 위로 생각의 파편들이 흩어진다. 나는 5분 전의 내가 아니다. 세상을 보던 시선이 변했다. 진실은 나를 통과했다.』기자의 트위터식 140자 <지식채널e> (현재 김한중 PD 연출) 감상문이다. 글 정미희 | 사진 김준영

소통의 5분을 위하여
재미에 대한 조급증으로 분주하게 채널을 돌리다가 검은 화면 위 덩그러니 놓인 문장을 멍하게 바라보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 다른 채널로 돌려도, 쉽게 몰입할 수가 없었다. 커피메이커에서 커피를 내리는 5분만큼이나 <지식채널e>의 5분은 달콤하고 강렬했다. 소설과 시의 감동을 문장 길이로 비교할 수 없듯 <지식채널e>이 지닌 생명력은 한 시간짜리 다큐 그 이상이었고, 시청자들은 메시지에 담긴 힘에 반응했다. “시청자들이 그렇게 호응해주신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 프로그램이 지닌 시각적인 세련미가 한 가지 요소였을 거에요. 형식미가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야 우선 채널이 고정이 되니까요.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지적 자극에 대한 욕구 때문이지 싶어요.”
지금처럼 인문학 열풍이 불기 전인 2005년, <지식채널e>는 대중매체의 ‘이래라 저래라’식 전달 방식에 대해 염증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지적 자극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자 하는 욕구를 채워준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이었다. 재미있으면서도 교육적인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고민에서 시작한 그들만의 방법이 통한 것이다.
그 방법은 자막과 음악이 지닌 힘의 활용이었다. 화면보다는 지식의 내용에 더 집중한 프로그램이다 보니 지식을 표현하는 자막이 화면보다 더 비중을 더 높이는 형식을 취했다. “5분짜리 프로그램의 자막을 한 달씩 썼어요. 굉장히 함축적인 프로그램이라서 평소에 그 부분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었죠. 내용을 다 파악하고 구성이 어느 정도 나와 있어도, 자막 하나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이 확 달라지거든요. 똑같은 내용으로도 그 내용을 30초대에 넣을 것이냐, 1분 30초대에 넣을 것이냐에 따라서 미치는 영향과 뉘앙스가 상당히 달라질 수 있죠.” 보통 화면과 내레이션이 주가 되는 영상매체에서 자막 자체가 ‘화면’이 되는 ‘영상의 형식을 취한 텍스트’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여기에 음악이 쌍을 이뤄 <지식채널e>만의 차별화를 이끌어 내는 멋진 합주를 완성했다. 음악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었다. 메시지를 명확하게 해주고, 해당 내용에서 표현되는 감정을 이끌어내는, 제작진이 시청자들의 감정 포인트를 설정하게 하는 하나의 도구였다. 음악이 프로그램의 내레이터 역할을 한 셈이다.
이것들을 결합해 프로그램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한 가지였다. “반드시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전제였어요. 그러나 최대한 강렬하게 지식에 자극을 주어야 했죠. 그러기 위해서 현장감이 중요했어요. 우리가 말하는 현장감은 바로 인용입니다. 제작진이 어떠한 방식으로도 꾸미지 않고, 최초 소스에서 차용하는 거죠. 예를 들면, 주인공의 목소리를 그대로 따오는 방식으로요. 여기에 힘이 있는 겁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지식채널e>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형식은 프로그램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고,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된 말 한마디의 힘을 여실히 드러냈다.

“EBS가 생각하는 지식은 암기하는 정보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입니다.
현학적인 수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입니다.
빈틈없는 논리가 아니라 비어 있는 공간입니다.
우리의 사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
- <지식채널e>‘ 스페셜’ 편에서


착하게 살자는 이야기
<지식채널e>에서 전달하고자 했던 지식은 알면 알수록 신비하고 오묘한 지식도 있지만, 알면 알수록 답답하고 먹먹해지는 지식도 있다. 전자는 상식을 풍부하게 해주고, 후자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해 마음이 불편해진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착함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걸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한 개인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좋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런데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국가의 전체적인 살림살이는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잖아요. 이런 사회는 그저 나만 잘 살면 다가 아니라 타인의 어려움이나 고통은 사회 전체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굉장히 큰 위험요소가 돼요.” 나만 챙기기에도 바쁜 이 시대. 최고의,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삶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에게 과연 그 위험요소가 인식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소외된 누군가를 외면할 때, 단순한 외면을 넘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휴머니즘을 잃고 마는 거죠. 사람이 건조해지고, 감성이 메마릅니다. 그걸 다른 문화적인 것으로 채우려고 해도 또 공허해지죠. 그 사람들을 외면함으로써 자기 안에 있는 좋은 감정들을 억누르는 결과를 낳는 거죠.” 그가 말하려던 지식은 바로 이것이었다. 울고 있는 누군가에게 웃음은 주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울지 않을 수 있도록 돕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러면 그 후에 자신 안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식채널e>는 개인의 양심이나 도덕성에 호소하는 메시지들을 주로 다루었고, 대안을 제시하더라도 구조적 문제를 직접 거론하기보다 개인적인 성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문제를 누구 탓으로 돌려서 변화시키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시작은 각 개인의 반성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청자들은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의미 있는 5분을 누리는 것이다.

소외된 자들과 마주침
그가 이런 메시지에 관심을 두고 전달할 수 있었던 단초는 <효도우미 0700>을 연출하면서였다.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개념, 가난이라는 개념이 한 쌍으로 항상 붙어 다니잖아요. 효도우미를 촬영하기 위해 그 분들을 직접 만나면서 그동안 막연하게, 굉장히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소외된다는 것이 이렇게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고, 자존감을 짓밟는 것이라면 이런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은 직접 가서 보고, 눈 마주치며 대화를 나눌 때 느껴지는 것의 반 밖에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 분들과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도망갈 곳이 없어요. 시사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자기합리화도 할 수 있고, 어차피 그런 거 아니겠냐면서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데 그 분들 앞에서는 도망갈 구멍이 없어요. 그 상황을 마주하면 내가 생각했던 인간성은 과연 무엇일까. 내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쉽게, 자주하는데 그게 도대체 나에게 무엇이었는가. 내 안에 인간성이 살아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자신이 그들의 환경을 바꿔줄 수는 없지만, 본 이상 열심히 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로소 단순히 프로그램을 만드는 피디를 넘어선 한 명의 언론인이라는 자각이 생겼다. 그리고 자신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통해 누구에게나 있는 좋은 에너지, 즉 선한 마음이 우위에 서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지난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논란과 촛불집회 등이 확산되던 시기에 광우병 파동을 다룬 ‘17년 후’를 제작했지만, 결방을 할 수밖에 없었고, 3년간 진행했던 <지식채널e>를 떠나 다른 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논란의 중심에 서있던 그였지만,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길 시기이기도 했다고 담담히 말한다. 발령 무렵에 진행했던 새로운 시도들이 안정권에 들어섰을 때 그만뒀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는 중학교 시절, 1년 간 방송반 카메라를 자신의 장난감 삼아 놀면서 네모를 잘라 영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마치 신이 된 것 같았던 그때의 강렬한 인상은 그를 오늘까지 이끌어왔다. 이제까지 다큐를 만들며 극사실주의에 몰입해 왔지만, 사실 그는 상상의 영역을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영화 <인셉션>이나 <시>처럼 기존의 장르를 넘나들면서 영화를 만들어보는 게 꿈이다. <지식채널e>에서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출했다는 <거대 우주선 시대> 6부작을 보며 그가 쌓아올리고 싶은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방송의 주도권이 시청자에게 넘어간 소셜네트워크 시대, 이제는 그 자신도 꼭 방송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지닌 풍부한 상상 에너지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 했다. 그 상상의 세계에도 분명 사람이 있을 것이기에.

감성 지식의 탄생

김진혁|마음산책


‘지식 연출자’ 김진혁 PD가 <지식채널e>를 완성하기까지 과정을 담은 책. 상세한 제작기 외에 제작 뒷이야기, 음악감독과 작가들의 인터뷰, 미처 만들지 못한 몇 편의 시놉시스와 콘티, 프로그램 제작 팁을 수록했다. 1인 미디어와 방송 피디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유용한 안내서 역할을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