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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0 11-12 잡지, '여기'를 기록하다

잡지, ‘여기’를 기록하다 1 l 지역 문화, 그곳에서 잡지라는 이름

우리 동네의 ‘오늘’이 역사가 된다
아무리 인터넷 세상이고 디지털 세상이 되어도 아날로그인 신문이나 잡지 등 인쇄물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비율은 실개천처럼 가냘플지라도. 어쩌면 가상세계가 현실이 될수록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가 그립고 반가운 것처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옛것의 향수가 살아날 것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공존이야말로 한줄기 희망일지 모른다. 홍수에 먹을 물이 없다는 비유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이 흐르는 작고 소박한 통로, 마음으로 소통하고 감동을 나누는 ‘지역 잡지’는 어린왕자의 별에서 자라는 장미처럼 소중하고 아름답다. 한글도 모르지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노인에게서 옹골찬 삶의 지혜를 배우듯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소한 일상이 바로 우리의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 이웃의 삶을 새롭게 만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것이 지혜다. 그 사소함을, 평범함을 보듬어주는 구심점이 지역 잡지의 역할일 것이다. 우리 동네의 ‘오늘’이 바로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마을에는 구심점이 필요하다
일전에 남도 여행 중에 꼬부랑 고개를 넘어 내닫던 아늑한 마을에 홀린 적이 있었다. 더구나 이른아침 낯선 마을 들머리에서 만난 서낭당은 설레는 반가움이었다. 커다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집이 발길을 붙들었다. 상쾌하게 쏟아지는 새소리가 아니더라도 고즈넉한 서낭당은 오랜만에 맞닥뜨린 그리움이고 정갈함이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마을 지킴이 서낭당이 아직 그곳에 오롯이 존재한다는 게 신기했다.
예전 서낭당은 동네사람들의 믿음의 대상이었고 경외의 대상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에 밀려 사라진 서낭당은 고향마을의 상징이었다. 서낭당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든, 최소한 그 지역의 자연을 지켜준다는 기능을 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큰 숲이라도 사람들의 정신이 깃들지 않으면 그냥 자연의 한 부분일 것이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때 그것은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지역의 설화와 전설은 확대 재생산되면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그리스에서는 시장의 아고라문화가 발달했었다. 유럽에는 광장문화가 소통의 장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사랑방문화가 있었다. 몇 천 년을 이어 온 마을의 문화가 불과 50~60년의 압축 성장에 사라져가고, 아파트 공화국의 뒤안길로 스러졌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우리의 뿌리를 확인할 그 무엇이, 지친 삶을 다독여 줄 우리의 공간이 필요하다.

세월이 갈수록 귀중한 자료집
세계화라는 흐름에 세계화할 수 없는 게 문화고 정체성일 것이다. 일전에 스페인을 여행할 때 들렀던 알람브라 궁전. 이슬람 문명의 진수를 보여준 그 궁전엔 덧대어 지은 로마식 건축물이 한 채 있다. 알람브라 궁전을 정복한 이사벨 여왕은 그 아름다움에 반해 그곳에 머물렀으나 무엇 하나 손대지 않았다. 완벽에 가까운 기하학적인 문양과 빛을 이용한 건축물들, 그리고 완벽한 대칭의 정원들…. 그러나 카를 5세 왕은 무언가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야심 차게 색다른 궁전을 지었으나 이내 후회했다고 한다. “아! 세상 어디에나 없는 것을 없애고, 세상 어디에나 있는 것을 지었구나.”
그렇다. 어디에나 있는 것과 없는 것. 우리의 생활에서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가치와 문화가 바로 우리 것이다.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시골 구석에서 잘 보존된 작가들의 삶터(유적지)를 만나게 된다. 작가의 일상이 그대로 묻어나는 그곳에서 작가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 최근에는 자신들의 삶터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골목길 투어가 인기코스로 등장하고 있다. 스스로 자신들의 삶에 긍지를 품을 때 그 지역은 ‘살고 싶은 마을’이 되는 것이다.

강원도에는 1987년 지역의 일간신문에서 창간했던 <월간 태백>이란 잡지가 있었다. 1997년 IMF를 겪으면서 이듬해 폐간 된 향토 잡지다. 10년이란 세월의 두께가 켜켜이 쌓인 그 잡지는 고향의 소식을 전하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산간 사람들과 바닷가 사람들의 삶의 체취를 고스란히 담은 소중한 자료의 보고였다. 지금도 자료가 필요할 때는 자주 그 잡지를 뒤적여 찾는다. ‘아! 이래서 지역 잡지가 필요하구나.’
어렵게 창간한 지역의 잡지들이 뿌리를 내리고 튼실한 나무로 자라나려면 관심과 경제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커피 한 잔에 보통 3천~ 5천 원까지 다양하다. 모 잡지는 창간 때부터 담배 한 갑 값을 고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월간, 격월간, 계간 등의 잡지 한 권 값이 커피 한 잔 값 남짓인데도 사람들은 인색하다. 말로만 문화와 교양과 소통의 중요성을 이야기 할 뿐, 마음의 양식에는 눈을 감는다. 커피 한 잔 값만도 못한 잡지를 왜 만드는지 귀 기울여 봐야 할것이다. 왜 그들이 그 잡지를 만드는지를. 우리 지역의 이야기가 생명력을 지니려면 따스한 관심과 배려가 따라줘야 한다.


신용자|춘천에서 생활하며 ‘봄내길’ 탐사에 폭 빠져있다. 강원일보 <월간 태백> 기자 등을 거쳤으며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 중. 저서로는 <푸른 별장으로의 초대>, <춘천 문학여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