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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클래식/국악의 숲을 거닐다

찬란한 슬픔을 연주하다

클라라 하스킬 Clara Haskil, 1895-1960

찰리 채플린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살면서 진정 천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세 명 만났다. 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으며, 한 사람은 처칠,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클라라 하스킬이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들어보았을 연주자 클라라 하스킬, 나에게 하스킬은 슬픔과 우아함이 묘하게 교차하는 연주가로 남아 있습니다. 춥고 지리한 겨울의 골목을 막 지나 생명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4월, 나는 본능적으로 남도의 푸른 들녘과 바다를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엔 하스킬과 그녀가 연주한 모차르트Piano Concerto No. 27 in B-flat major가 함께 하였지요. 누군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찬란한 슬픔’이라고 말했다는데, 나는 그의 슬픔을 이토록 우아하게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 한 사람 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지요. 아, 피아노의 성녀, 클라라 하스킬. 6살 때 들은 모차르트의 연주를 즉석에서 외우고 심지어 조까지 바꾸어 연주했던 그야말로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을 빼닮은 신동 중의 신동. 가브리엘 포레를 사사하고 15세에 파리음악원을 최우수로 졸업한 그녀는 이미 어린 나이에 이자이, 카잘스 등과 협연하고 브람스, 발라키레프, 힌데미트 등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비루투오조 피아니스트로서, 그녀의 피아니즘은 너무나 일찍 그토록젊은 나이에 절정에 이르고 말았지요. 너무 일찍 핀 처연하게 아름다운 꽃이었던가요. 운명처럼 찾아온 병마로 인해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물이 채 되기
전 찾아온 세포경화증뼈와 근육이 붙거나 세포끼리 붙어 버리는 불치병은 그토록
아름다웠던 젊은 그녀를 잿빛머리와 등이 굽어버린 할머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온몸에 깁스코르셋을 하며 8년간의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보내야만 했지요. 다행히 손과 팔목 근육으로는 병이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근육의 무리 없이 연주할 수 있었던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고 다시 연
주를 시작한 그녀,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전쟁은 스페인계 유태인이었던 그녀로 하여금 다시금 7년 동안이나 고독한 은둔자로 살게 했고, 그 기간에 그녀는 뇌종양으로 사선을 넘나들어야 했습니다. 가엾은 클라라! 그러나 이 모든 시련에도 하스킬은 또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름다운 선율로 승화합니다. 당시 하스킬과 카랴얀이 협연하는 모습을 본 러시아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는 인상 깊은 회고록을 남겼습니다.

“무대로 걸어 나오는 그녀의 몸은 구부러져 있었고, 잿빛 머리카락
은 온통 헝클어져 있어서 마치 마녀처럼 보였다. 공연이 시작되고 오케스트라가 도입부를 연주했다. 별 다른 감흥도 없었지만, 그래도 잘 하는 연주였다. 드디어 피아노 솔로가 시작될 부분이 되어서 클라라 하스킬의 두 손이 건반 위에 놓였고 음악이 흐르는데, 내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중략) … 얼마나 확신에 찬 음악인지, 얼마나 강한 흡인력인지… 피아노 솔로가 지나고 나서 다시 오케스트라가 투티를 받았는데 그 순간에 모든 것은 마술처럼 다 변해있었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클라라 하스킬이 10개의 손가락과 가슴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내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연주회였다.”

문득, 이 겨울, 봄을 갈망하듯 하스킬의 음악이 그리워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아마도 그건 그녀의 삶과 음악이 완성한 진정한 아름다움 때문일 겁니다. 그녀의 음악은, 그래서 더욱더 찬란합니다.

백광훈|따사로운 창가에서 클래식과 커피한잔을 즐길 것 같지만‘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 열혈 애청자인 문선연의 책임연구원이자 두 아이의 아빠고 목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