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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복사기의 슬픔

작년 말, 김명준 감독의 다큐 <우리학교>를 보며 일본 속에서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눈물겨운 분투 앞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종종 외국에 나가있는 친우들로부터 2세들의 우리말 교육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을 전해들을 때면 문득문득 부끄러워진다. 그에 반해 근래 높으신 분들이 야심차게 내어놓은 '영어몰입교육' 따위의 넋 놓은 정책은 딱히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외국에 나가 많이 배우셨다는 분들은 어쩜 그리들 한결 같으실까. 모르긴 몰라도 그 분들은 뭐든 미국을 복제하는 게 인생의 목표이지 싶다.

유학이 나라를 망친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이 나라 곳곳에 뿌리 깊은 사대주의의 근원에는 ‘유학留學’이 있다. 몇 해 전 공자의 유학儒學이 나라를 망친다는 책도 있었지만, 나는 믿는다.  실은 ‘유학留學이 나라를 망친다’고.

직접 나가는 것 외에는 외국의 선진 문물과 최신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던 시절도 아니고, 때론 현지에 있는 친구보다도 더 빨리 현지의 뉴스를 접할 수 있는 인터넷 시대를 사는 것이 바로 우리다. 번역된 학술 서적, 전문서적들의 규모나 수준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다. 웬만한 사람이 유학 가서 수준급으로 공부하게 되는 서적들을, 우리는 이곳에서 당장이라도 우리글로 읽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거다. 진짜 유학을 가서 공부해야하는 사람은 극소수인데 반해, 한국에서 매년 내보내는 유학생은 지나치게 많다. 졸업 후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친구들은 입버릇처럼 유학이나 갈까 이야기한다. 너나없이 유학을 가고 싶어 하는 사회 분위기라니. 유학을 다녀와야 뭐라도 될 것 같고, 외국 유학 다녀오지 않고서는 대학 강단에 설 수도 없는 꼴이니, 우습지 않은가.

게 중 특히 쑥스러운 분야는 음악 계열이다. 이쪽은 말 그대로 실력 있는 애들보다 있는 집 애들이 나가는 경우가 더 많을뿐더러, 수많은 음악 유학생들이 있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음악가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유학이란 ‘간판 따기’ 내지는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는 라이센스 취득의 가장 기초적 행위’ 정도 되겠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런 ‘가진 사람들의 유학 이후’인데, 별 부족함 없이 자라 소위 선진국의 문화까지 체험, 섭취해버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도 그곳이 자신들의 이상향이 되어버리며, 이곳을 그곳처럼 만드는 것이 스스로의 고결한 목표가 되어버리고 만다. 정책을 좌우하는 고위층들, 혹은 대학의 교수들 대부분은 외국 유학을 경험한 이들이고, 그들 대다수의 머릿속엔 그곳을 닮고 싶은 열망으로 들끓고 있지는 않은지 심히 의심스럽다. 배운 곳의 영향을 받는 건 당연하지만, 중심을 세우지 못한 선진 문화의 경험과 그에 대한 섣부른 적용은 우리의 현실을 외면해버리는 사대주의의 선물로 그쳐버릴 것이 분명하다. 


한국 예배, 원본이고 싶다

한국적 예배 음악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에도 이와 비슷한 경향의 문화 사대주의가 엄연하다. 초기 경배와 찬양을 이 땅에 들여와 정착시킨 분들 역시 ‘유학파’들이 많았고,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바 아니나 아쉽게도 그들이 전해 준 것 중에는 ‘복사본에의 강요’ 같은 것도 있었다고 본다. 올 초, 모교의 개강 수련회 때 강사로 오신 목사님께서 한국의 예배 음악사역(자들)의 영성이나 스타일이 소위 특정 선교단체의 스타일로 획일화 되는 것의 심각성에 대해 신랄하게 지적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한 성령께서 일하신다.’라고 말하기엔 차마 쑥스러울 만큼 우리의 찬양예배 모습은 획일적으로 정형화 되었고, 물론 그 원본은 외국에서 찾을 수 있다. 비디오나 DVD를 보며 비교해 보시라. 90년대에는 Hosanna Integrity와, 2000년대에는 Hillsong과 놀랄 만큼 똑같다. 무대의 퍼포먼스도, 객석의 반응도. 노래의 표절만이 표절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예배 의식 자체를 표절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몇몇 찬양 예배모임에서는 번역된 가사가 아닌 원어가사 그대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더라. 정부의 바람대로 ‘영어몰입예배’를 드리고 계신 분들께 묻고 싶다. 원어의 깊은 의미에 대한 번역의 한계 어쩌구 변명 하실지 모르겠으나, 굳이 우리말로 옮기기 힘든 그들의 정서를, 왜 그들의 말로, 그것도 예배시간에까지 불러야 하는지 말이다. 그 시간에 우리 자신의 예배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우리의 표현으로 올려드릴 무언가를 고민하는 게 더 온당하지 않은가 말이다.

슬프게도 복사기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똑같이 잘 베꼈다’ 이다. 제 아무리 최고급 복사기라 할지라도 복사기의 일은 ‘창작’이 아니라 ‘복제’다. 한국 교회가 세계 최고 수준의 교세와 위용을 갖추었음에도 결코 좋은 원본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외국의 유명한 목회자가, 혹은 음악 사역자가 우리의 예배를 보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이렇게 얘기할지 모르겠다.

“오~ 원더풀~ 정말 우리가 드리는 예배랑 똑같습니다.”



민호기|소망의 바다 사역과 함께 찬미선교단 리더로, 대신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로, 오늘도 세상과 소통하는 음악을 위해 밤새워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