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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TV 상자 펼치기

코미디를 지켜야 하는 몇 가지 이유


코미디가 대위기를 맞고 있다. MBC는 <하땅사>를, SBS는 <웃찾사>를 잇따라 폐지하였고, 현재 시청자의 사랑을 받
는 코미디 프로그램은 KBS의 <개그콘서트>만 남은 상황이다. 지난 연말 연예대상에서도 이런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MBC 연예대상에선 코미디/시트콤 부문의 상을 탤런트와 가수들이 독식했고, SBS에선 코미디 부문 자체를 아예 삭제하기도 했다. 그에 따라 유재석 같은 예능 부문 수상자가 코미디 몰락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해 화제가 되었다. 특히 KBS 연예대상에선, 상을 받은 김병만이 이례적으로 타사를 언급하며 “MBC, SBS 사장님! 코미디에 투자해 주십시오”라고 발언해 뜨거운 호응을 받기도 했다. 그럴 정도로 코미디 몰락에 대한 위기의식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것이다. 이런 여론에 의해 최근 MBC는 정통코미디 프로그램의 부활을 약속하기도 했다.

웃음도 인스턴트 시대
코미디는 왜 이렇게 몰락했을
까? 예능이 너무 재밌어진 것이 원인이다. 예능의 직설적이고 감각적이고 생생한 재미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코미디 코너에 몰입하는 것을 점점 번거롭게 여기게 되었다. 예능은 편하게 수동적으로 봐도 순간순간의 짜릿한 재미를 즐길 수 있지만 코미디는 그 설정 속으로 집중할 것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코미디는 어차피 웃자고 있는 것인데, 예능이든 코미디이든 웃음의 총량만 확보된다면 굳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존폐에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코미디와 예능은 웃음의 성격이 다르다. 코미디는 사전에 기획된 대본에 의한 것이고, 예능은 돌발적인 성격이 강하다. 예능의 웃음이 순발력에 의해 만들어진다면, 코미디의 웃음은 창의성에 의해 창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코미디의 몰락은 우리 방송계에서 창조성이 약화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예능의 웃음은 1회적이고 감각적인 데 반해 코미디의 웃음은 더 깊은 공감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코미디는 예능도 할 수 있는 말장난을 넘어 시대를 풍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된 남녀 세태를 묘사했던‘ 남보원’, 선후배 위계질서의 부조리함을 통렬하게 표현했던 ‘분장실의 강 선생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대사로 한국사회를 내쳤던‘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 남성 우월주의자의 우매함을 조롱하는 ‘두 분 토론’ 등의 웃음은 예능에선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다.

사라져가는 웃음의 원천을 위하여
오직 코미디가 당
대와 호흡하며,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웃음을 창조해낼 수 있다. 또 예능의 웃음이 밝은 톤 위주라면 코미디는 아픔이나 슬픔까지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다. 고통과 슬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웃음으로 녹여낸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예능은 이런 종류를 담아내기엔 너무 ‘얇은’ 그릇이다. 또 예능이 응용 부문이라면 코미디는 기초 부문이요 기간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응용 부문이 아무리 화려해도 기초 부문이 허약하면 대중문화가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 예능이 아무리 웃음에 대한 욕구를 채워준다 해도 코미디가 아쉬운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방송사들은 코미디 프로그램과 연말 연예대상에서 코미디 부문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지켜나가야 한다. 가수와 배우들의 순발력이 유일한 웃음의 원천이고 시대의 웃음을 대변한다면, 곤란하다.

하재근|날라리의 기질과 애국자의 기질을 동시에 타고 났다. 그래서 인생이 오락가락이다. 어렸을 때 잠시 운동권을 하다, 20대 때는 영상 일을했었고, 30대 초중반부터 다시 운동권이 됐다가, 요즘엔 다시 날라리로 돌아가 대중문화비평을 하고 있다. 때때로 책도 쓰며 인터넷 아지트는
http://ooljiana.tistory.com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