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사랑을 믿어요>

서혜진을 만나다


햇살이 환한 어느 오후, 그녀가 차 한 잔 하자며 나를 찾아왔다.
“혜진 씨, 일을 시작하더니 얼굴이 훨씬 좋아 보여요.
부관장으로 취직했다면서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얼떨떨하고요.” 혜진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수줍
게 미소 짓는다.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낄 수 있다.
세월을 무색케 하는 여전히 뛰어난 그녀의 미모. 아름답다. 그녀는
평범한 남편과 유치원 다니는 딸을 둔 주부다. 그녀의 남편은 정수기 회사에서 일하면서, 그녀를 프랑스 파리로 3년 동안 유학을 보내줄 만큼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와서도 직장을 얻지 못하는 현실에 비관하며 나를 찾아왔었다.“이렇게 지지리 궁상떨며 살지 말자. 만날 밥하고, 빨래하고, 살림하다가 보내는 그런 인생은 살지 말자. 무언가는 하자. 무언가는 네 인생에 의미 있고, 보람 있고, 꿈을 이루는 그런 일을 하자. 내가 나한테 그렇게 요구해요!” 그랬던 그녀가 얼마 전부터 미술관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녀가 불안하다. 불우한 가정환경을 뛰어넘어 박사 학위까지 딴 그녀지만 여전히 뭔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듯 문득문득 표정이 어둡다.
“이젠 삶의 의미를 찾은 것 같아요?” 내 질문에 그녀는 표정이 환해진다. “좋아하는 그림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돈도 벌고 경력을 쌓을 수 있어서 제겐 나쁠 것 없고요.” “ 아이를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만 하는 삶은 여전히 힘들겠죠?” 잠시 침묵이 흐른다. “네. 그것만으로는 힘들어요. 전 그렇게는 살 수 없어요.” 더 나은 삶의 자리와 꿈을 찾아 헤매는 그녀에게 물었다“. 혜진 씨는 사랑을 믿어요?” “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녀의 표정이 뜨악하다. “사실 저도 밥하고, 빨래하고, 살림하는 것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전 사랑을 믿지 않거든요.” 순간 혜진의 얼굴이 굳는다. 그녀에게 뜨거운 커피를 따라주며, 잠시 기다린다.
“사랑을 믿으면 꼭 실망하게 되더라고요. 사람은 믿음의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 요즘처럼 와 닿는 때가 없어요. 그냥 나 자신부터 소중히 여기면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 곁에 있을 때 사랑하며 사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함께 할 시간, 그리 길지 않더라고요.” “무슨 소린지 알아요.”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녀, 안타까움에 마음이 따갑다“. 한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혜진 씨, 조금 걱정돼요. 그 끝에 무엇이 남을까요?” “나의 꿈, 나의 성취 같은 거요. 난 내 삶의 의미를 찾고 싶으니까요!” 그녀의 눈은 이미 저만큼 가 있다. 그래, 급할 것 없다. 또 만나면 되니까. “웃어요, 혜진 씨. 난 혜진 씨 웃으면 쌓여있던 시름이 다 사라지는 것 같던데. 그 웃음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 잊지 말아요.” 그녀가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떠나기 전, 그냥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난 그녀를 다그칠 수 없다. 그녀의 모습은 현실에 만족할 줄 모르는 나이며, 욕망을 좇아 끝없이 달려가는 내 모습이기도 하니까. 아마도 그녀는 쉼 없이 뛰어올라간 계단 끝에서 다시 말하겠지.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그 때는 함께 산책을 해야겠다. 필시 지루해할 테지만, 푸른 하늘과 팔랑팔랑 날아가는 새, 연둣빛 이파리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줘야지.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할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 글은 픽션임을 밝힙니다).

배성분|한때 드라마를 쓰고 싶어서 모 작가교육원에 면접까지 거쳐 1년을 배우러 다녔다.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고 있지만, 내 삶의 한 자락한 자락을 모두 이으면, 드라마가 될 거라 믿고 있다.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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