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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읽다/고전으로 오늘을 읽다

진실한 고백을 그분께 ㅣ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다

고전古典을 읽는다는 것처럼 고苦된 일이 없습니다. 게다가 ‘고전’으로 ‘오늘’을 읽겠다니, 이건 뭐, 쓰리고에 피박을 당하는 입장쯤 될 겁니다. 시대와 사회, 문화가 전혀 다른 언어를 해독하고 해석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한 과제이지요. 영어 하나만 하기도 벅찬 판국에, 일본어와 중국어도 능통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은 상황이랄까요.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채 고전을 펼친다면, 슬슬 머리엔 쥐가나면서 짜증과 원망이 마구 솟구칠 겁니다. 왜 구닥다리, 읽기도 어려운 고전을 읽어야 하는 걸까요?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네, 고전을 읽지 않고도 먹고사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을 섬기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우리를 깨우쳐 기꺼이 당신을 찬양토록 하셨으며,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지 않고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권 1장(이평옥 옮김).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까닭은, 고전을 읽을 때에만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한 문장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한 사람의 존재가 송두리째 변화되는 데 필요한 것은 그저 한 문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성 아우구스 티누스(St.Augustinus,354-430)도 하나의 문장을 만남으로써 거듭난 사람이었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가 시작될 무렵인 4
세기 중반, 로마제국의 변방인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Tagaste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납니다. 지금의 알제리가 있는 곳이지요. 그는 당시 가장 큰 항구도시였던 카르타고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습니다. 일찌감치 세상을 선악이원론으로 바라보는 마니교에 귀의하였고, 한 여인과 동거하기 시작하여 17살에 아들을 낳기도 하죠. 이후 로마로 가서 마니교의 후원을 받으며 화려한 성공을 거두고, 밀라노에도 진출합니다. 하지만 궁정에서 아첨하는 자신의 일에 염증을 느끼고, 마니교에도 회의를 품기 시작하고 그 후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번민이 가시지 않던 삶을 살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느 날 이웃집에서 어린 아이들이 “집어서 읽어라tole lege”고 반복하는 소리를 듣게 되죠. 성경을 펼쳐서 첫눈에 띄는 구절을 읽으라는 내면의 소리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펴든 것은 로마서 13장 13-14절 말씀이었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을지어다.” 이때의 일을 <고백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더 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구절을 읽고 나자 불현듯 평안의 빛이 나의 마음속을 가득히 비추어 어두운 의혹의 그림자는 사라져 버렸습니다”(8권 12장, 이평옥 옮김).

타가스테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새로운 기독교 변증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391년에 히포Hippo의 주교로 임명을 받죠.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처럼 이루어지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교회 지도자급 인사를 물색하여 무력으로 잡아다가 사제로 세우기도 했으니까요. 그도 억지로 사제직을 맡지만 곧 설교하고 저술하는 일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합니다. 그 시절은 기독교가 형성되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수많은 이교와 이단과 경쟁하고 논쟁하며 교회를 세워나가야 했죠.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정교한 사상과 방대한 저술로 기독교를 변증합니다. 일생동안 자신이 세어본 바로는 93권이나 되는 책을 지었고(실제로 117권), 300통의 편지를 썼으며, 대략 8,000번의 설교 중 400편 이상의 설교문을 남겼습니다.

<고백록Confessio>은 히포의 주교가 된 아우구스티누스가 과거를 돌아보며 지은 책입니다. 간혹 이 책의 제목을 ‘참회록’이라고 번역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그런 번역은 피하는 게 좋겠죠). 하지만 라틴어 콘페씨오Confessio는 영어의 콘페션Confession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가 사용했던 ‘고백’이란 단어에는 죄를 고해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의미도 함께 들어 있는 것이죠. 심지어 게리 윌스라는 걸출한 학자는 ‘고백록’을 ‘증언testimony’이라고 고쳐읽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으니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 은혜를 입는 것과 연결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보소서, 상처를 감추지 않고 있사오니. 나는 병자, 당신은 의사, 나는 가엾은 몸, 당신은 가엾이 여기는 분이시니이다 ”(10권 28장, 최민순 옮김).

그가 고백하는 이유는 치명상을 드러내어 치유를 받기 위함이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인’이자 ‘현대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았다는점에서 그렇죠. 그는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 내가 내 안에 있는 것보다 더욱 깊이 내 안에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죄를 낱낱이 들추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살피는 것이죠. 결국 심연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삶의 모든 여정이 하나님을 향한 여정임을, 삶의 모든 추구가 하나님을 향한 추구임을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백록>을 읽는 것은 이를 통해 우리도 한 문장의 진실한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기 위함일 겁니다.
이 한 구절을 읽고 고백록의 소개를 마칠까 합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운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10권 27장, 최민순 옮김).

추천할 만한 번역본은 세가지 정도인데요. 우선 도착어(한국어)에 더 충실한 번역을 통해 문장이 유려한 최민순 님이 옮긴 <고백록>바오로의 딸, 2010을 추천합니다. 그보다 원문의 맛을 보고 싶은 분께는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범우, 2008을 추천합니다. 출발어, 즉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균형을 원하시면 <성 어거스틴 고백록>대한기독교서회, 2003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전기로는 게리 윌스의 <성 아우구스티누스>푸른숲, 2005가 유익합니다. 글 이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