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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클래식/국악의 숲을 거닐다

음악의 소명과 마주하다 ㅣ 디누 리파티 Dinu Lipatti, 1917-1950

나는 클래식 연주회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감동적인 순간을 떠올릴 때면, 1950년 9월 16일 프랑스 브장송에서 있었던 어느 음악가의 고별 연주회를 그립니다. 지극히, 그토록 순수하였기에 오롯이 명멸할 수 있었던 한 영혼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을 거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에게 부여된 음악의 소명과 마주하고자 했던 한 음악가의 가장 진실한 순간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리파티, 그는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서 태어나 서른셋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한 피아
니스트였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를 둔 리파티는 자연스럽게 음악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요. 하지만 리파티의 짧은 생애가 말해주듯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그는 학교에도가지 못한 채 집에서 생활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천부적 재능과 좋은 스승들은 그를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만들기에 충분했지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마저 그의 피아니즘을 부러워하고 극찬할 정도로 젊은 나이에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이르렀습니다.

위대한 예술가의 삶에 종종 드리우는 비극적 운명처럼 치명적인 백혈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죠. 리파티에게 남은 것은 젊은 천재 음악가의 절망스러운 죽음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운명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병상이 아닌 피아노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주옥같은 음반을 남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남긴 불꽃같은 음악은 대부분 이 4년의 투병 시간에 기록된 것들입니다. 아, 왜 그토록 위대한 그들의 시간이 저토록 빨리 사라져야만 하는 것일까요? 음악은 그에게 죽음보다 강한 하나의 소명이었습니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직감했을 무렵 그는 생애 마지막 연주회를 감행합니다. 이 연주회는 음악 역사상 가장 영롱한 순간으로 남게 되죠. 1950년 9월 그의 마지막 콘서트를 그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짧았지만 빛났던 그 분 생애의 종점이었습니다. 그이는 2개월 뒤인 12월 2일, 33세의 나이로 죽을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병이 아주 깊었는데도 브장송 연주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했습니다. 콘서트는 음악에 대한 그이의 맹세였습니다. 기운을 차리기 위해 주사를 연거푸 몇 대나 맞았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일이 그분에게는 정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는 발걸음과 같았습니다... 폭발적인 갈채가, 연주장에 도착한 리파티를 맞이했습니다. 각처에서 모여든 청중들은 가슴이 뭉클했지요. 청중들은 죽어가고 있는 이 젊은 천재의 마지막 연주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면서도 리파티는 그의 기도이기도 했던 바흐의 코랄을 용기를 내어 치기 시작했습니다. 연주회장에 있던 사람이라면 그 가슴 찢어질 듯한 이별을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레퍼토리인 쇼팽의 왈츠 2번을 남겨놓고, 그는 모든 힘을 소진한 듯 피아노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리파티에게 울먹이면서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었습니다. 한참 지나 박수도 끝이 나고 녹음실의 녹음기도 철수할 무렵, 리파티는 기적같이 다시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 지상에서 마지막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힘에 부쳐 못다 연주한 쇼팽 왈츠 2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침마다 기도처럼 연주했던 바흐의 코랄 “Jesu bleibt meine Freude”, “예수는 나의 기쁨”이었습니다.
리파티, 정녕 당신에게 음악은 언제나 기도의 순간이었고, 끝끝내 완성해야 할 소명이었던가요? 죽음도 당신의 기도를, 당신의 고결한 소명을 빼앗을 수 없었던가요?
오롯이 명멸하여 빛이 된 그의 삶과 음악은 그리하여 이제 위대한 영혼으로 우리에게 남았습니다.

백광훈|따사로운 창가에서 클래식과 커피한잔을 즐길 것 같지만‘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 열혈 애청자인 문선연의 책임연구원이자 두 아이의 아빠고 목사다.